드디어 만항재에 도착, 많은 사람들이 휴게소와 주위 공원에 들러 삼삼오오 사진을 찍거나 먼길을 달려온 여독을 풀기 위해 쉬고 있었다.
처음 들린 건 아니지만 2016년 가을에 한 번 들린 터라 낯설기는 마찬가지.
(눈꽃들만의 세상, 함백산_20151128, 첩첩한 이끼 계곡과 만항재_20161015)
대부분 사람들이 만항재에 잠시 들렀다 다시 갈 길을 재촉하는 것 보면 최종 목적지가 아닌 거듭된 오르막에 잠시 쉬는 정도 같다.
그들과 목적지가 확연히 달라 깊은 심호흡과 함께 산골 낮이 그리 길지 않은 걸 감안하여 지체하지 않고 하늘숲길로 향했다.
가는 길이 매끈하게 보였지만 예상과 달리 비포장 노면이 그리 좋지 않아 프레임 SUV가 아닌 이상 속도 내기가 힘들어 천천히 길을 따라 전진했다.
만항재에 도착하면 간단한 이정표와 함께 공원과 하늘숲길 지도가 잘 나와 있어 길 찾기엔 그리 어렵지 않고, 다만 초행길에 대한 생소함만 극복하면 되겠다.
처음 하늘숲길이라고 하는 운탄고도를 찾은 건 5년 만이다.
당시 화절령에서 출발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만항재에서 부터 출발, 어쩌면 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자신만이 간직한 추억과 그에 대한 징표가 있듯 내 시간이 나무 마냥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어느새 빼곡한 나무숲처럼 기억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유독 가을이 되면 다른 계절에 비해 과거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현되는 상황을 모면할 수 없고, 결국 이번 여행도 그런 기억들이 내 등을 떠밀었다.
만항재에서 화절령까지 하늘숲길을 따라 가면 15.5km, 왕복으로 31km라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그리 넉넉하지 않아 자작나무코스만 걷기로 했다.
하늘숲길이란 원래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을 용이하게 나르기 위해 조성된 운탄고도로 정선에서 관광 상품 개발 일원으로 처음엔 하늘길로 개명하여 트래커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근래 강원랜드 주도로 동부지방산림청, 폐광 지역 4개 시군인 태백, 정선, 영월, 삼척 그리고 태백산 국립공원 사무소가 협약하여 총 264km에 4가지 길, 10여개의 코스로 정립 하였고, 하늘숲길이 있는 지역이 1,000m 이상의 고지와 능선길인 만큼 어느 지역보다 한적하고 오지의 특성대로 자연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곳이다.
허나 산악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전국 강산 곳곳에 무수히도 많은 리본을 매달아 놓았고, 심지어 마음이 콩밭에 가는 경우도 참 많이 봐왔다.
정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나간 자취를 전혀 남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보존 하려는데 미꾸라지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변질된 산사랑으로 인해 진정한 산악인들에게 인식의 피해를 많이 줬던 만큼 리본을 달아 알리는게 아니라 보존된 곳을 아끼는 게 더 중요하겠다.
정선은 오지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난개발을 자행하며 뭇매도 많이 맞지만 곳곳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를 꾸며 놓거나 좀 더 돋보이게 가공을 한 부분들도 있다.
요건 후자!
혜선사 초입에 가을 정취가 물씬하다.
혜선사 방면이 아닌 바로 뒷편은 비탈진 산기슭인데 힘찬 물소리가 지칠 기미가 없다.
아무래도 1,000m가 넘는 고지대라 평지와 달리 가을이 떠날 채비를 끝낸 만추의 풍경이지만 흔적만이라도 고마울 뿐이다.
지나는 사람이 전혀 없어 스피커의 볼륨을 살짝 올리고 길을 떠난다.
낙엽은 많지만 여전히 절정의 가을을 뽐내고 있는 나무도 많아 걷는 걸음걸음이 설레고 가볍다.
짧은 오르막을 올라 지나온 길을 바라보자 무성한 가을 정취가 겁나 멋지고, 인간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여러 가을색이 풍성하게 물들어 있다.
만항재에서 오는 길은 간헐적으로 이렇게 포장된 길이 있는데 대부분은 비포장의 전형적인 오프로드다.
혜선사는 규모가 작고 일반적인 사찰의 법당은 보이지 않는데 나무숲에 가려진건지 아니면 불교 사찰이 아닌건지 알 수 없고, 다만 무성한 나무숲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고산지대라 단풍 나무는 그리 많지 않지만 물든 단풍의 색은 무척이나 곱다.
길을 조금 더 걷다 보면 다시 비포장도로가 나오는데 과거 운탄길이라 비포장길 치곤 매끈한 편이다.
길을 따라 앞만 보고 걷다 문득 산 아래를 둘러 보자 지나온 방향이 보이고 그 너머 풍력 발전소도 제법 큰 굉음을 내며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다시 앞만 보고 걷다 산아래 시야가 훤히 트인 곳에 서서 산아래를 내려다 보자 상동에서 만항재로 올 때의 산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워낙 오지에 산림이 우거진 곳이라 언뜻 봐선 보이지 않지만 방향과 틈틈이 살피는 지도를 보면 정황상 길이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유심히 봐야만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면 곳곳에서 나무숲을 만나게 되고 그 나무들은 가을에 흠뻑 젖어 있다.
이따금 너른 지대의 탄광 흔적을 만나게 되는게 자작나무 코스 답게 너른 자작나무숲이 제법 눈에 띄인다.
가던 길에 발목을 잠시 끄는 싯구는 도중에 잊을만 하면 보이는데 짧은 시라 한눈에 읽는 사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뿐 숨이 가라앉았다.
제법 많이 걸어왔는지 눈앞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던 풍력 발전기들이 나무젓가락처럼 아주 작게 보였다.
화절령 방향으로 가던 길은 행정구역상 영월 상동이며 우측 산능선은 정선, 길 좌측 산아래는 자연스레 영월 상동이 된다.
그래서 일찌감치 지나왔던 상동은 길 아래 깊은 산계곡을 따라 길게 뻗은 마을이겠지?
다시 한숨을 돌리고 가라는 짧고 아름다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퍼플이 눈부신 꽃.
길을 걷다 모퉁이처럼 크게 돌아가는 커브길을 지나자 이렇게 시야가 확 트인 장소도 나온다.
풍력 발전기가 얼마나 많았으면 만항재 부근에서 부터 여기까지도 능선을 따라 나열되어 있다.
사진과 달리 걷는 동안 대부분 구간은 바람이 무척 강해서 덩달아 풍력 발전기도 신이나 굉음을 내며 힘차게 돌아갔다.
산 언저리에 널찍이 분포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새가 눈에 금새 띈다.
과거 탄광 지대 였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은 이제 잊혀질 약속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시간의 일부일 수 있다.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아 도리어 나와 같은 인적이 그리웠을지도 모를 나무숲길은 정적과 함께 낙엽이 자욱히 쌓여 고독의 근원을 짐작케 한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을이 이다지도 아름답게 세상을 위로하고 있다.
오로지 정적이 지배하는 이곳에 이따금 들리는 자연의 소리를 제외한다면 풍력 발전기의 미약한 굉음은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허나 이렇게 가을숲 너머 한눈으로 바라본다면 아득한 정취도 느껴져 역시 가을은 평범을 비범으로 단장시켜 줄 위대한 존재였다.
길 아래 상동이 있고, 다시 그 너머에 거대한 장산이 위용을 뽐내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동으로 향하는 꼬불꼬불 복잡하게 휘어진 골짜기는 절정의 가을이 머무르며 지상의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마법의 채색을 도색시켜 놓았다.
가던 길을 잊고 이 자리에 서서 그간 아껴왔던 감탄사를 마음껏 뱉어내지만 그럴수록 감탄의 솔직한 심정이 더욱 격앙될 수 밖에 없었다.
작은 꽃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화사하게 눈부신 대기의 스펙트럼을 잘게 부순다.
꽃잎이 떨어지면 전체 망울은 원래대로 오므리며 씨앗을 품는다.
다시 만난 탄광의 너른 흔적에 거대한 자작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조잘대듯 거대한 숲을 이뤘고, 그 너머에선 비교적 큰 산이 버티고 앉아 나처럼 지상의 가을을 한껏 즐기고 있다.
바람 소리도 소음이 아닌 음악의 선율처럼 들리며 나지막이 속삭이는데 어느 순간 또 다른 자연의 소리가 반가운 선율처럼 끼어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나무 뿌리 아래 작은 물줄기를 떨구었다.
탄광 지대를 거쳐온 물줄기인지 물이 떨어지는 자리는 까맣게 채색되어 있다.
한참을 걸어 나무숲 터널길에 접어 들자 원시의 가을 정취에 압도당해 더이상 입으로 터트리는 감탄사조차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다.
만추의 정취라 무성한 나무터널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도리어 길바닥에 낙엽도 소복이 쌓여 마치 온사방이 가을에 정복당해 그 절정의 행복에 빠져 나올 의지를 잃어 버린 양 잠잠한 바람결을 타고 대기 내음조차 가을 일색이었다.
이 길을 걸으며 바닥 자욱한 낙엽 밟는 소리는 정적을 깨는 민폐가 아니라 함께 합주하는 경연 세트를 준비해 놓고 어느 누구든 연주할 주자를 기다린 게 아닌가 착각도 들었다.
낙엽을 밟을 때 그 여파로 쓸리는 낙엽들이 서로 몸을 부비는 소리는 이미 가을의 의도로 마련된 함께 채우고 누리는 모든 것 중 일부였다.
멀리 허공에서 까마귀 한 쌍이 소리를 내며 큰 원을 그리듯 비행을 하고, 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작은 마을과 길은 상동이었다.
까마귀 한 쌍이 순식간에 서 있는 자리로 날아와 주위를 맴돌며 지저귀는데 위협적인 시그널이 아니라 무거운 정적에 흥미로운 변화를 주는 엑센트 였다.
상동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거대한 위세에 까마득하기만 하던 산 허리에 지금까지의 동경을 깨고 서 있는 만큼 성취감이 뒤섞인 감회는 실로 새로웠고, 그와 더불어 어느 하나 허술한 부분 없이 빼곡히 조화의 마법을 부리는 가을로 인해 시간과 공기의 흐름은 정지된 것처럼 미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멸종은 하찮은 손짓 마냥 신경쓸 겨를이 없고 빈번해졌다.
결국 직선에 밀려 곡선도 멸종의 약속만 남겨 뒀는데 오지의 이 곡선조차 가을과 어울리면 이렇게 아름답다.
시간이 꽤나 많이 흘러 예정된 반환점을 찍어야 할 타이밍이 다가오자 마지막 응원을 아낌 없이 퍼부어 주는 나무숲을 만났다.
만추의 풍경과 달리 단풍은 이토록 곱게 물들어 산아래로 흘러 내려가는데 그 뜨거운 빛깔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시간은 야속하리 만큼 인정사정 없이 16시를 넘겨 버렸다.
나무숲을 지나자 마자 시야가 확 트인 자리에 잠시 다리를 쉬게 하며 산 아래를 둘러 보자 상동 광업소 인근이 아닌가 싶었다.
오전에 지나왔던 지역을 두루두루 둘러 보며 첩첩이 산이 쌓여 있는 능선과 인접한 지역에 쉬고 있는 가을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피로감이 잊혀 졌고, 가을이 남은 단풍에 마지막 열정을 뜨겁게 지펴 놓은 흔적도 볼 수 있었다.
불은 감각과 존재의 끝을 희뿌연 재로 종식 시키지만 가을은 숨어 있던 감동을 춤추게 한다.
예정된 시각보다 좀 늑장을 부려 어둠이 다가오는 속도감이 걷잡을 수 없었고, 서둘러 가을로 위안 삼은 원동력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탄광시절에 번영을 누리던 이곳 일대는 이제 모든 걸 자연에게 내어줬지만 여전히 남은 흔적들은 시간을 표류하고 있는 회상의 일부며 자연은 상흔조차 이렇듯 멋지게 단장시켜 놓았다.
인적이 전혀 없던 가을의 하늘숲길, 고산지대인 만큼 만추가 만연하지만 계절의 흔적 또한 추억처럼 아름드리 시선과 발걸음을 유혹함과 동시에 변질을 의심하던 추억이 생생하던 크나큰 위안도 덤으로 챙기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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