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12

여정 끝의 시리도록 선명한 시간, 정선 고성산성_20220318

이번 여정의 마지막은 나지막한 산에 틀어 앉아 휘몰아치는 동강과 첩첩이 버틴 산세에 둘러 쌓인 산성으로 저만치 먼 곳에서부터 숭고한 자연에 기대어 꿈틀대는 길이 모이는 곳이었다. 짙은 구름과 달리 청명한 대기 아래 심연과 같은 적막은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면에 닿아 깊은 겨울잠에 허덕이는 낙엽을 깨우기 위한 속삭임에 감미로운 울림을 증폭시켰다. 전날 찾아간 칠족령 절벽길의 아찔한 절벽이 선명하게 서있고, 그 아찔함 가운데 홀로 몸부림치는 하늘벽구름다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초라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미물 같은 초상에 짙은 화장을 하느라 여념 없는 내 모습도 투영되어 겸손한 자연의 모습이 한발 떨어져 비로소 위대한 진면목을 깨달았다. 여정을 떠날 때 무겁던 봇짐은 비교적 홀가..

전설과 절경이 서린 곳, 동강 나리소와 바리소_20220318

전설의 주인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들어선 절경의 전설들. 신비롭게 포장된 설화에 정선은 살짝 양념을 가미하여 지나는 시선들을 현혹하고, 현혹된 시선은 발길이 떠날지언정 그 자리에 머물러 상상이라는 종이에 그로테스크한 여운을 남겼다. 나리소 전망대를 조금 지나면 나리소탐방로가 있어 뜀박질하듯 한달음에 오르자 설화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나리소 절벽 바로 윗지점이다. 설사 이무기가 떠났다고 하더라도 마치 수중에 웅크리고 있다고 여기자. 동강의 절경은 도드라지고 특출 난 어느 하나의 공로가 아닌 이 모든 자연의 요소와 더불어 설화와 이야기들의 상호작용이니까. 동강로를 따라 한참을 질주하는 동안 드문드문 농가가 있긴 했으나, 대부분은 공백지대나 다름없었고, 운치리에 지날 즈음 인가가 확연히 드러났..

절경에 장관을 덧씌우다, 하늘벽 구름다리_20220317

동강 절벽길의 치명적인 경이로움에 신중한 발걸음과 달리 가슴은 헤아릴 방법이 없다. 얼굴 내밀기 시작한 봄꽃은 지나는 길에 한숨이 되어주고, 절벽 아래 또 다른 세상은 인색하던 감탄의 장작을 기꺼이 내어준다. 걷는 길이 신중한 건 발 밑에 도사린 위험 때문이기도 하고, 좁은 길가 무심히 팔 뻗은 자연의 깊은 울림 때문이기도 하다. 돌 하나, 스치는 바람조차 생명의 심박 소리로 꺼져가던 무미한 시선이 번뜩이고 흥에 겨워 나도 모르게 이 시간이 느려지길 애원하며, 그래서 청명하던 대기로 시작해 턱 밑 깊은 숨소리조차 감사에 눈물겹다. 하늘벽 구름다리는 정선군 신동읍에 위치하며, 덕천리 제장마을에서 연포마을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기암절벽과 절벽 사이에 놓인 유리다리다. 높이는 105m, 길이 13m, 폭이 1...

절경의 기억이 명징한 순간, 동강 칠족령_20220317

세상을 향해 가슴 내밀 듯 동해 바다와 만나는 뭍의 경계를 이어주는 해파랑길이 이번 바다 여행의 백미였다면 내륙의 백미 중 하나는 바로 동강이 첩첩의 산을 비집고 들어서 뭇 생명의 기개에 봄의 효능감을 나눠주는 젖줄이 아닐까. 발길을 구애하듯 몇 년 걸쳐 애정의 징표 마냥 숨겨진 그 모습에 절절한 그리움을 여과 없이 살가운 고백을 해도 봄의 시샘이 뿌연 장벽을 밀어 넣어 늘 멀어지는 동강과 그 절경을 뭉특한 모습으로 애간장 화답했지만 이번만큼은 청명한 대기가 선명한 수평선도 보란 듯 활짝 가슴을 열었다. 한 무리 산악회 사람들이 빠져나간 고갯길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말없이 흐르는 동강처럼 다시금 시간은 유유히 흐르고, 지나던 구름도 잠시 멈춰 땀을 훔쳤다. 칼날 같은 절벽의 그 미려한 선에 뭐가 그리 ..

막장과 삶의 포용, 운탄고도_20211027

가을이 되면 막연히 그리운 곳, 담양과 정선 중 하늘숲길이 있는 정선땅을 밟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들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공존의 친근함을 과시하는 하늘숲길 일대는 무겁게 석탄을 이고 가는 삼륜차에 밟히고, 시간의 폭풍에 먼지처럼 옛 시절이 흩어지자 이제는 고독에 밟힌다. 언젠가 사라질 약속처럼 한 때 세상을 풍미하던 석탄은 비록 폐부와 생존의 지루한 복병이었지만 이제는 사무친 그리움의 석상이 되어 비록 까맣던 흔적이 증발해 버릴지언정 가슴에 새겨진 기억은 돌처럼 더욱 굳어져 버렸다. 그 애환을 아는지 속절 없이 능선을 넘은 바람은 선명한 자취처럼 꿈틀대는 운탄고도에서 긴 한숨을 돌리며 터질 듯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잊혀진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또한 ..

시선의 확장, 하늘숲길 화절령_20210228

꽃을 꺾던 나그네는 어디로 가고, 석탄을 나르던 둔탁한 소리는 언제 사라졌을까? 큰 고개 넘어 한숨을 돌려도 사방엔 첩첩산이 끝없는 선을 잇고, 어느새 오르막길에 대한 가쁜 숨이 송이송이 진달래처럼 피어나 감탄사가 되어 피로와 설움을 잊는다. 평지에서의 절망이 깊은 산중에서 희망이 되어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왔건만 시간에 쫓긴 변화는 어느새 희망을 절망으로 변질시켜 버렸고, 거리와 빼곡하던 인가는 휑한 공허만 남아 깨진 소주병이 자욱하다. 삶의 시름도 태고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건만, 그 찰나의 통증은 그다지도 서슬 퍼런 여운이 사무치던가. 공허와 땀내만 남은 운탄고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추파를 던진다. 2014년 이후 화절령은 처음 밟았다. 그 이후 몇 차례 올 기회가 있었지만 강원랜드에서 ..

산과 강의 어울림 속에서, 하동 고소성_20201118

섬진강 남쪽 구례에서 광양으로 가는 강변길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데다 봄이면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길게 늘어서 드라이브 하기 좋은 도로로 그 길을 따라 화개로 진행했다. 화개장터 일대는 장날이 아니라 인파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휑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말과 노래로만 접하던 화개는 화개천을 중심으로 양갈래 높은 산과 더불어 상류 방면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지리산, 섬진강 너머 구례 또한 높은 산이 버티고 있어 너른 동네는 아니지만 밀도 있게 짜여져 있다. 다음 목적지 고소성으로 가던 중 잠시 들러 한참을 달려온 여독을 깊은 한숨으로 밀어내고 다시 가던 길을 바란다. 화개로 가던 중 '전망 좋은 곳'이란 푯말을 따라 잠시 들른 곳은 섬진강변 작은 휴게소로 전망 데크가 있었다. 남도대교로를 따라 운..

가을 열매 설익은 하늘숲길, 화절령 가는 길_20201007

가을이면 달골 마냥 찾는 곳 중 하나가 정선 하늘숲길(사북의 잃어버린 탄광마을_20141129, 하늘숲길에 가을이 찾아 들다_20191023,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로 고산지대에 조급한 가을과 더불어 눈앞에 첩첩이 펼쳐진 산능선의 미려한 행진곡이 멋진, 단순히 연결의 의미로 채워진 길이 아닌 감상의 의미가 가미된 길을 찾았다. 그 길을 나서기 전, 큼지막한 텀블러에 커피 한 잔을 채우기 위해 아침 시간대 고한에서 동네를 둘러둘러 겨우 찾은 카페에서 듬직한 내용물을 담아 차로 총총히 가던 중에 만난 담벼락 아래 나팔꽃 무리들이 살랑이는 바람살에 나풀거렸다. 나팔꽃에 새겨진 별이 북극성처럼 갈 길을 잃지 마라고 토닥여 주는 걸까? 잠시 고개 숙여 환한 응원을 받았다. 6년 전에 밟았던 운탄..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

원래 계획되었던 하늘숲길은 기존에 출발점으로 삼았던 화절령과 만항재가 아닌 두 고개 사이, 하이원CC 인근에서 화절령 방면으로 출발했다. 서울 수도권은 코로나19로 인해 심리적으로 잔뜩 위축되어 마스크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고 바깥 외출은 극도로 기피하는 것과 달리 여행 떠나온 3일 동안 강원도 일대는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식당 같은 곳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하등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지나가는 몇몇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녔다. 코로나 관련 뉘우스가 나오면 강원도는 괜찮다는 주변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리는 걸 보면 아직은 경각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구나 싶은데 평소 서울 수도권에서 정선 사북/고한으로 오는 여행객이 많았던걸 대비해 보면 지금은 여행객..

칠족령의 마법_20190329

파크로쉬에서 이어지는 동선은 지난번과 거의 같다.정선에 들러 동막골 곤드레밥을 줍줍하고 칠족령으로 넘어가는데 2월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난 반면 이번엔 조금 늑장을 부렸고, 다만 지난번처럼 길을 헤매거나 가던 길을 멈추고 여유의 감상에 젖지 않아 막상 도착 시각은 거의 비슷했다. 동강은 여전히 귀한 생명들의 은신처와도 같은 곳이었다.물론 꽃을 찍기 위해 들린 건 아니지만 화사한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쳐다 보는데 외면할 수 있을까?신록의 싹이 대지를 뚫기 전, 황량한 물감이 만연한 가운데 가끔 고개를 내밀고 햇살을 한껏 받아 들이는 꽃들의 고운 빛결이 한 눈에 들어와 시선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봄의 정령들은 어떻게 이런 화려하고 화사한 색의 유전자를 깨우쳤을까?눈이 즐거운 만큼 이런 작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