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힘든 여정의 감로수, 치악산 남대봉/상원사_20210817

사려울 2023. 2. 2. 13:59

평소 산을 거의 타지 않는 얄팍한 체력에도 뭔가에 이끌린 듯 무작정 치악산기슭으로 오른 죄.
평면적인 지도의 수 킬로를 우습게 본 죄.
시골 출신이라 자연 녹지의 낭만만 쫓은 죄.
여전히 대낮 기온 30도를 웃도는 여름에도 물 한 병 의지한 채 내가 마냥 청춘이라 착각한 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실한 준비로 치악산에 오른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고, 산길로 따라가며 내내 자책했다.
산이름에서 '악'이 들어가는 산은 입에서 '악!'소리가 난다고?
치악산 남대봉을 오르며 카메라 넥스트랩과 백팩조차 땀에 완전 절어 버릴 만큼 체력의 바닥이란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산길 400m가 그렇게 지루하고 더딘지, 평소 인적이 거의 없다는 반증인지 길조차 애매하거나 온통 이끼로 뒤덮인 산길을 의심조차 없이 방만하게 출발했다.
상원사와 1,100m 넘는 능선길에서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 있기 전까지 모처럼 맛보는 고행은 고통이었고, 그래서 지난 이 시간이 값진 경험의 한 페이지였다.
금대계곡 따라 상원사-남대봉-능선길 전망대-영원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비록 거대한 치악산에 비한다면 수박 겉핥기지만 미약하게나마 승산 있는 도전은 내게 있어 살아 있음을 반증하게 된다.
치악산 나무숲은 정말 우거져 산 정상이나 능선이 아니고선 바깥 세상을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오를 때 '악!'소리 나고, 오르면 '와!'소리 난다. 

 

 
 

원주를 출발한 열차가 지금은 이름만 남은 치악역으로 가는 길에 거치는, 아마도 우리나라 유일 또아리식 철도가 원주 치악산 금대 쪽이라 기억한다.
얼마 남지 않은 유물 중 이미 사라진 클러치백처럼 특이한 형상의 루프식 철도로 현대화란 미명하에 직선화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 구간은 미약한 촛불처럼 남아있다.
곡선으로 대표 되던 간이역과 특이한 철도 대부분이 사라지면 이제는 사람들의 추억에서 잊혀질 약속만 남는다.
산간 오지의 발이 되어 주던 철도가 이제는 더 이상 배려할 포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서 영원사와 영원산성까지 다녀온 생생한 경험대로 금대에 주차한 뒤 곧장 영원사까지 질주(?)했다.
남대봉까지 영원사는 필수 관행과도 같은 곳이라 주저할 틈 없었고, 가던 길에 영원사를 조금 못 간 지점에서 말벌을 만나 맨땅에 한 번 구른 뒤로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도 없었다.
영원사에서 갈라지는 코스 중 지난번과 달리 영원산성이 아닌 상원사에 좌표를 찍고 유일하게 그어진 길만 밟고 부지런히 나아가자 급격히 숲이 우거지고 영원사 전까지의 풍경과는 완연히 달라졌다.

이건 누가 실력을 발휘한 걸까?

숲이 우거져 있어서 그런지 유독 버섯도 눈에 종종 띄는데 특히나 요 녀석은 사람 얼굴만 했다.

여기서부터 고행의 시작이었다.

계단 수도 많지만 경사도가 흔하게 보던 기울기가 아니었다.
급격한 오르막 뒤에 다시 내리막길로 여울을 건너는데 여울을 건너던 중 카메라 렌즈 덮개가 빠져 다리 아래 여울로 떨어져 버렸다.
얼마나 견고하게 여울로의 접근을 막았는지 잠시 애를 먹었다.

렌즈 덮개를 다시 주워 올라온 뒤 작은 폭포수의 소리에 흐르는 땀과 정신적 갈증을 함께 삭혔다.

작은 폭포수 옆 데크 계단으로 올라야 되는데 비교적 나무가 우거져 사진 찍는 것도 쉽지 않아 대부분 나무, 계단, 바위에 가려졌다.

여울에 발을 담글 수 없고, 손도 씻을 수 없다.
허나 지금까지 인간이 무례하게 만진 건 괴롭히고 파괴될 수 있다.
눈으로만 즐겨야지.
그래서 백옥처럼 맑다.

참으로 계단 많다.
덕분에 나처럼 산에 문외한도 치악산을 오를 수 있긴 한데 여전히 갈 길이 먼데도 진행 속도가 더디다.

산이 험해서 그런가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계단 손잡이 아래 작은 실 같은 벌레가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자칫 녀석의 휴식을 방해할 뻔 했다.

거대 바위 틈바구니로 난 길이 또! 계단이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계단을 오르며 그 규모가 거대한 바위임을 알게 됐다.

매력적인 야생화 군락지가 의외로 넓게,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게 길인데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지?

또 계단!!
급경사 구간이라 옆에 낡은 동화줄이 있어 그나마 오르기 수월해졌지만 숨은 차고 다리는 움직이기 힘든다.

그 가파른 계단을 넘어 여기서 쉬는데 물맛이 꿀맛이다.
또한 숲 사이로 언뜻 멋진 절경이 살짝 고개 내민다.

매혹적인 야생화 군락지는 크나큰 힘이 된다.

또 급경사의 기나긴 계단이다.
능선까지 '매우 어려움' 구간인데 그 단순한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이토록 고될 줄이야.

드디어 완만한 구간에 진입, 이 정도면 힘든 구간 '매우 어려움'을 지났다.
이 능선길이 얼마나 반가운지 감격에 또 감격이다.

상원사와 남대봉 갈림길에서 주저 없이 상원사로 방향을 잡아 그대로 전진했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수 있는 수풀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상원사는 생각보다 멀다.
그래도 힘든 구간이 아니라 진행하기 수월한데 그 길가에 특히나 요 녀석이 많다.
뚝배기 같은 아름다운 야생화라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시선은 자연스럽게 여기로 향한다.

무성한 풀숲을 헤쳐 지나면 어느 순간 시선이 확 트이는 산 언저리에 상원사가 나온다.
상원사 초입에 화장실이 있는데 그 앞에서 펼쳐진 세상은 그토록 바라던 갈망 같았다.

원주 8경 중 제3경 상원사는?
상원사는 치악산 남쪽 남대봉 중턱의 해발 1,100m의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스님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말 나옹스님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1968년 다시 지어진 후,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심우당, 심검당, 범종각, 산신각 등이 있다. 높은 곳에 조성된 사찰답게 자연 지형에 맞게 배치되었다.
상원사에는 은혜 갚은 꿩의 전설이 전해온다.(이 부분은 다른 이야기와 조금 상이하다)
치악산 기슭에 수행이 깊은 승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하였다. 그날 저녁 승려는 폐사가 되다시피 한 구룡사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승려는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친친 감고 노려보며 "네가 나의 먹이를 먹지 못하게 했으니 대신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이 산중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너를 살려주겠다"고 했다.
상원사에 가야만 종이 있는데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하여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세 번 울려왔다. 구렁이는 기뻐하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므로 다시는 원한을 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승려가 상원사로 올라가 보니 종루 밑에는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원래 가을 단풍 빛이 아름다워 붉을 적(赤)자를 써 적악산이라 불렀는데 꿩의 보은설화로 인해 꿩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대웅전 앞의 두 탑은 모두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을 쌓은 것이다. 
1971년 12월 16일에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석탑으로 해발 1,100m 이상의 높은 高地에 사찰이 경영된 것과 이러한 높은 곳에 쌍탑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쌍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1964년에 거의 완전할 정도로 보수하여 보존되어 있다. 
석탑 옆에 불상 뒤를 장식하던 광배와 불상을 받치던 대좌가 남아 있다. 광배에는 부처님의 머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둥근 선으로 새기고, 그 밖으로 불꽃 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연꽃과 당초 무늬를 새겨 놓았다. 1964년에 우측 석탑을 보수할 때에 탑신에서 관음보살좌상 · 인왕상 · 아미타불립상 · 석가여래입상의 금동불 4구가 발견되었는데, 제작수법이 매우 우수하고 신라 때에 유행하던 수법과 같은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 광배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정면 3칸(8.4m) · 측면 2칸(5.3m)의 겉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집이다. 법당의 불상은 새로 봉안한 것이고, 석가래와 기둥 등은 모두 정연하며 두 공부에 용두(龍頭)조각을 배치하여 주목을 끈다. 근년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보이는 질서 있는 건축물이다. 안쪽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및 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란히 쌍탑이 있는데, 이러한 쌍탑이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삼국통일 이후로서 왕성한 국력에 의하여 전국도처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정형을 따른 2중기단 위에 3층옥개를 형성하였으며, 상부 상륜부는 둥글게 연꽃봉오리 모양을 새겨 일반 탑에서 보기 어려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원주시청_원주관광

 

 
 

고진감래란 바로 치악산자락 상원사를 두고 이른 말일 수 있다.
거의 쉬지 않고 고단한 산행의 한계점에 만난 사찰로 갈증이나 굶주림이 극에 달할 무렵 이정표의 귀로처럼 갈등 중 해발 1천미터 이상의 경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고팠는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 서는 순간 출발선상에서 부터 괴롭히던 갈등과 후회도, 불신에 대한 의지도 모두 내려놓고 자연 앞에서 경건해지는 희열은 비단 오랜만에 느끼는 역치 이상의 자극이었다.
여타 종교당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과 확연히 다른 태생적 차별로 인해 화사함과 엄중함이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거란 편견을 여지없이 종식시키고, 마치 텅 빈 평면적 지각에 반하여 한 여름임에도 따스한 햇살이 잔잔한 파고로 출렁이는 곳, 산은 어떤 격랑에도 움직이지 않는 통찰을 거푸집 삼아 거기에 슬며시 올려놓은 자연조차 예사롭지 않다. 

상원사 초입에 여러 꽃들 중 유독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 끄는 꽃.

갈증해소와 맛을 여기와 비할 곳 몇 될까?

상원사의 아픔_옮김
상원사는 1300년을 이어 신림을 지키고 원주시를 지키며 조선 오백 년 동안에는 국래민만을 위하여 기도 하던 절입니다.
일제 전에는 상원사의 땅이 신림면에서 주천으로 넘어가고 성남리로 들어오던 곳까지 상원사 땅이었다고 합니다.
일제 때 5만 9천5백 평을 제외한 땅을 빼앗아 갔으며 상원사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바위 위에 쇠 말뚝을 박았다 합니다.
이렇게 일제는 땅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쇠말뚝을 박으며 산의 정기를 훼손 시키자 하였습니다.
일제가 끝나고 1971년 시청에 몇몇 사람이 모여 조합을 만들고 원성군에 있는 땅 들을 원성군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상원사 땅 역시 5만 9천5백 평을 둘러싼 땅들을 원성군 땅으로 등록하였으며 상원사 만이 아닌 원성군에 있는 많은 땅 들을 원성군으로 등록하였습니다.
상원사로부터 남대봉으로 3백 미터 밖에 몇백 년 되는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는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화장하고 난 뒤 뼈를 묻고 돌로서 스님의 무덤이라는 표시입니다.
스님의 무덤조차도 원주시의 땅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부도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원주시 땅이라고 주장하며 상원사로부터 사백 미터 아래에는 전성함이라는 곳이 있으며 1960년경에 대행 스님이 수행하며 계속 관리를 해오던 곳이 있으며 남대봉 가는 길에 잣나무 심어 놓은 곳이 있는데 상원사에서 감자를 심어 먹던 곳입니다.
일제를 겪으면서 힘에 의해 땅을 빼앗겼으며 이제는 원주시에 땅을 빼앗겨 맹지가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원주시가 바른 행정을 하여 시민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함에 불구하고 절에서 1300년을 관리하던 해발 1100 고지의 땅을 원주시의 땅이라 등록한 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합니다.
정기가 훼손되는지 절에 이런 아픔이 있는지...[생략] 

해발 1천~1천1백미터 정도 고지에 종교당과 연결된 그 흔한 도로조차 없는 곳으로 같은 물도 갈증이 심할수록 더욱 단것처럼 감탄사도 더 솔직하게 뱉게 된다.

이 모든 게 사찰의 흔한 풍경이라면 흔하지 않은 단 하나, 그 너머 풍경이다.

치악산 전설에 등장한 종으로 꿩이 보은을 위해 이 종을 울렸단다.

상원사를 대표하는 범종과 절벽에 의지한 나무 한 그루.

그 너머 풍경, 아니 절경이라 하자.

상원사 쌍탑은 앞서 발췌한 대로 훼손되었다가 많은 부분 복구 되었단다.

대웅전 옆 석불들.
탁자와 벤치가 몇 개 있어 거기서 가방 속에 있는 주스를 꺼내 마시며 호젓함에 취한다.

석불이 있던 벤치에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성남리 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상원사 마당에 두 순둥이들.
백구는 계속해서 힐끗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악수할 뻔 했다.

상원사를 기억에 새기는 방법.
다행스럽게도 미세먼지 농도가 그리 높지 않다.

상원사를 빠져 나와 왔던 길로 진행하다 보면 첫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틀면 남대봉으로 가는 길, 직진하면 왔던 길이다.

 

 

상원사에서 남대봉으로 방향을 잡고 걸으면 처음에 만난 능선길에 합류하게 되는데 얼마 가지 않아 세존대란 기암괴석이 나온다.
원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마치 사람 얼굴 옆모습 같아서 원주를 우러러 지키는 수호신 같다.

 

 

남대봉은 봉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우뚝 솟은 게 아니라 능선길의 일부 같았다.
인상적인 치악산 능선길을 따라 전망대를 지나 영원산성길로 하산, 나무숲이 무성한 능선길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고, 그 무성한 숲에서 솟구쳐 하늘과 가까워지면 능선종주전망대를 밟게 된다.
무척이나 인상 깊은 전망대는 치악산 최고봉인 비로봉까지 하나의 미려한 선으로 연결되는데 최고봉답게 머리 하나 더 우뚝 솟은 예리한 첨탑처럼 까마득한 거리에 비로봉의 위상은 압권이었다.
계단이 없었다면 치악산의 번뜩이는 능선을 볼 수 있었을까?
또한 그 능선의 위세에 가려진 진풍경 또한 직접 보며 감탄의 화답을 보낼 수 있었을까?
원주로 내리는 거대한 빛내림과 모든 세상을 태울 듯한 석양과 달리 대기로 흩어져 버린 핏빛역사가 무색하게 돌무더기 같은 산성은 처절한 잠에 빠져 버렸다.
특이하면서 고혹적인 야생화, 특이한 모양새로 속이 텅 비어 있음에도 여전히 푸른 낙엽을 틔운 나무, 거대한 두 바위가 마치 개선문처럼 수직 평행으로 뻗은 기암괴석 등 여름의 기나긴 낮이 고마웠던 하루다.

앞서 방문한 상원사 뒷편의 큰 어른 남대봉은 비로봉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가 아니라 표지석이 없다면 그저 능선길 일부로 착각할 수 있다.

치악산의 또 다른 명소, 종주 능선길을 따라 비로봉까지 10km 남짓.
원래 계획대로 능선길을 따라 진행한다.

치악산이 맞나 싶을 만큼 남대봉 산행길과 달리 능선길은 무척 완만하다.
한 사람 다닐 수 있는 좁은 소로지만 그렇다고 비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음에도 속은 비었다.
능선길을 타고 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으로 생명의 인내와 집착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모양을 만들었다.

고귀한 기품이 느껴지는 당잔대.
군락지가 눈에 띄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급격한 내리막에서 바로 급 오르막 구간으로 거대 기암이 개선문처럼 나란히 수직으로 서 있다.
치악산에서는 계단이 필수다.

능선길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당잔대가 고혹적이라면 이 꽃은 화려한 마릴린 먼로 같다.

종주 능선 전망대에 도착 전.
걸음을 재촉하여 어느새 능선길 최고의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백운산 방향.

부곡마을.

원주 허공에 거대한 빛내림이 마치 투명한 커튼 같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해가 많이 기울었다.

지나왔던 능선을 바라보자 세존대와 그 옆에 완만하게 솟은 남대봉(1,181m)이 있다.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는 시명봉(1,196m).

우뚝 솟은 봉우리는 치악산 최고봉인 비로봉(1,288m)으로 머리 하나 더 높다. 머리??

비로봉을 자세히 보면 뿔처럼 튀어 나온 돌탑이 보인다.
정상 부근 경사가 장난 아닌데!!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능선길을 따라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수풀에 반쯤 몸을 숨긴 전망대가 보인다.

능선길에서 영원산성과 향로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영원산성으로 방향을 잡고 비교적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다.

계단이 없었다면 이런 절벽과 급경사를 어찌 오를 수 있었을까?

많이 진행한 것 같은데 갈림길에서 불과 500m 왔다니!
아직 훨씬 더 많은 거리가 남아 있어 쉬지 않고 열심히 내려오는데 가끔 고운 자갈로 인해 넘어지지 않았지만 미끄러져 위험할 수 있겠다.
산에 오르기 전 벌을 피한다고 한 번 굴렀을 때 무릎과 발꿈치가 꽤 광범위하게 찰과상을 입었는데 시끔시끔하다.

 
 

 
 

폐허처럼 남은 영원산성은 위에서부터 내려왔을 때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지난번 영원산성으로 올랐을 때 최종 종착점이자 쉼터 였던 망대.

열심히 내려가지만 도대체 거리가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거리 측량을 잘못한 건가?

산성을 벗어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만나자고 했던 이 길.

남대봉 산행은 앞서 영원산성에 비해 몇 곱절 힘든 경험이었다.
평탄한 길이 나오는 영원사는 여기서 불과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만만하게 본 후유증은 생각보다 꽤 커서 허벅지와 종아리에 간헐적으로 쥐가 났다.
해가 질 시간대라 서두르지 않더라도 늑장을 부리면 안 되어 틈틈이 스트레칭하며 내려왔는데 너른 길을 만나자 만사를 얻은 기분이었다.

출발점인 금대분소에 가까워지자 해가 완전 넘어가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치악산엔 비로봉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전체가 하나의 험준한 산이었다.
오를 때 지속적인 오르막길로 인해 정말 끝이 있을까 의문과 동시에 고행의 길과 같았고, 무척 고단하기도 했다.
웬만한 산이라면 완만해지는 구간도 있고 때론 작은 내리막도 섞여 있지만 남대봉 구간은 징그럽게도 힘든 오르막 뿐이었고, 무턱대고 이 여정을 선택한 스스로를 원망할 기운도 없었다.
그러던 고된 과정을 겪고 난 뒤 정상에서의 성취감은 또 어떻게 표현하고 기억해야 될지 난감했다.
분명한 건 내가 해냈고, 그 감회를 고스란히 가슴에 담아 두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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