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가을 열매 설익은 하늘숲길, 화절령 가는 길_20201007

사려울 2022. 12. 26. 21:37

가을이면 달골 마냥 찾는 곳 중 하나가 정선 하늘숲길(사북의 잃어버린 탄광마을_20141129, 하늘숲길에 가을이 찾아 들다_20191023, 하얀 하늘숲길을 거닐다_20200203)로 고산지대에 조급한 가을과 더불어 눈앞에 첩첩이 펼쳐진 산능선의 미려한 행진곡이 멋진, 단순히 연결의 의미로 채워진 길이 아닌 감상의 의미가 가미된 길을 찾았다.

그 길을 나서기 전, 큼지막한 텀블러에 커피 한 잔을 채우기 위해 아침 시간대 고한에서 동네를 둘러둘러 겨우 찾은 카페에서 듬직한 내용물을 담아 차로 총총히 가던 중에 만난 담벼락 아래 나팔꽃 무리들이 살랑이는 바람살에 나풀거렸다.

나팔꽃에 새겨진 별이 북극성처럼 갈 길을 잃지 마라고 토닥여 주는 걸까?

잠시 고개 숙여 환한 응원을 받았다.

6년 전에 밟았던 운탄고도, 그중 화절령에서 출발했던 당시와 반대로 이제는 화절령으로 향했다.

그리 이쁜 단풍의 향연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고, 다만 세상에 텅 빈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적막한 가을을 곱씹을 수 있겠다.

자연은 참 위대하다.

먼지 자욱한 애환을 고스란히 덮고 지웠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운산자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삶의 애환길이라 칭해도 이제는 그리움에 사무친 시간들이 가을길처럼 수놓은 추억, 그 시간이 땅에 새겨져 아름드리 가을의 미려한 붓으로 촘촘히 물들였다.

1,200m가 넘는 고지라 한 켠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백운산의 완만한 능선이, 남쪽으로 펼쳐진 반대편은 거대한 골짜기 너머 무수히도 많은 능선의 빼곡한 곡선이 춤을 췄다.

절정의 가을에는 살짝 미치지 못하지만 작년처럼 10월 하순이 되면 무심히 지나친 가을의 흔적만 남아 있어 불과 보름 정도의 차이로 가을은 살포시 왔다 쏜살 같이 남으로 내려갔다.

잡고 싶은 마음은 늘 조급하고, 그로 인해 여운은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깊은 자국을 남겨 기다림의 추파만 메아리로 진동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늘숲길의 가을이지만, 수 많은 애환의 바퀴가 오래도록 밟으며 잘 다져진 길처럼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자취와 무심한 자연이 모여 하나의 거대하고 특별한 잔향이 되어 버렸다.

걷는 동안 세상을 잊을 수 있었던 건, 그래서 우주 공간처럼 진공의 완벽한 적막을 누리며 신경의 피로가 마비된 건 무던히도 따라붙던 흥겨운 기억의 장단이 아니었나 싶다.

이 길에 추억을 새긴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삶을 바느질하며, 또 어떤 색감으로 물들일까?

백운산 마천봉의 위용이 거대한 장벽처럼 정면 시선을 가로 막았다.

인류의 출발은 직선이 아닌 곡선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 곡선이 정겨우면서 아름답다.

길 모퉁이마다 시를 수놓았다.

크게 휘몰아치는 길에서 웅장한 백두대간을 볼 수 있다.

전나무숲길을 만나 잠시 걷던 속도를 늦췄다.

길을 걷는 내내 모든 걸 잊고 평온만 챙기라는 토닥임 같았다.

첫 갈림길.

올 초에 하늘숲길을 밟았을 때 마천봉으로 향하는 작고 완만한 오르막길로 방향을 잡았었고, 호텔 뒷편으로 내려갔었다.

정선은 같은 길도 이야기로 수놓는 재치가 있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건 운탄고도의 애환을 버리지 않고 품고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보랏빛이 바람을 더듬었다.

좀 더 성숙한 가을이 물감을 정교하게 풀어 헤친 길로 낙엽도, 바람도 모두 속삭이며 귀를 간지럽힌다.

아무런 약속이 없었음에도 반가운 약속을 한 마냥 설렜다.

이대로 걷는다고 해도 지치지 않고, 각별하지 않은 풍경이 스쳐 지난다고 할지라도 식상하지 않을 이번 여행길, 다만 옛 추억이 싹트고 있는 어렴풋한 기억의 형체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심했던 시간들의 속 정이 이 길의 든든한 동반자로 나눌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출발할 때와 달리 급격히 구름이 끼어 쨍한 햇살은 볼 수 없었지만 화사한 대기는 잃지 않아 도리어 걷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를 스치는 무수히 많은 이슬방울로 금새 백운산 마천봉과 그에 준하는 봉우리들은 자취를 감추고, 잠시 열어 놓은 렌즈 위에 미세한 방울들이 들어찼다.

산중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지만 금새 비가 쏟아져도 개의치 않고, 걷는 걸음에 유희를 계속 누리며 무수히 만나는 곡선 넘어 졸고 있는 이야기들을 깨워 그간의 정겨움을 나누리라.

걷다 만나 너른 쉼터 같은 곳, 외롭던 벤치에 몸을 맡기며 커피 한 모금의 짜릿한 대화로 한숨과 함께 피로를 털어냈다.

전나무 가지가지마다 가을이 물들어 산중의 호젓한 정취에 마음이 덩달아 포근해졌다.

하늘숲길 전 운탄고도라 불리던 사연을 기록해 놓았다.

삶의 무게가 땅을 짓눌러 짙은 길을 만들고, 정취는 배가 시켰다.

이미 가을이 한창인 곳도 있었다.

한발 한발 사각거리는 낙엽의 환영이 마치 잔잔히 뿜어져 나오는 음악 같았다.

단풍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라 어쩌면 가끔 만나는 이 강렬하고 단아한 색감이 반가운지도 모른다.

6년 전 화절령에서 이곳까지 걸어와 비 내린 뒤의 멋진 구름과 절묘하게 어울린 산중의 전경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장화 모양의 구름도.

작은 연못인 줄 알았던 곳이 정화시설이란다.

넓게 트인 전망을 두고 있어 하늘숲길의 작은 공원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렇게 가끔 만나는 숲길엔 어김없이 낙엽이 소복히 쌓여 가을의 정점을 걷는 착각에 빠졌다.

빨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여기까지 오기 전, 몇 사람을 만났다.

사람과 잠시 떨어져 있기 위해 오지를 찾았는데 이 오지에서 만나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도리어 반가웠다.

바람과 함께 은은히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이 여기에서 들으면 각별하다.

더불어 한 줌 시에 잠시 시선도 쉬게 했다.

어느새 두터운 구름과 뺨을 간지럽히는 이슬비가 밀려들었다.

복병처럼 다가온 이슬비는 발을 묶거나 회심의 후회가 아니라 이 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친구며 함께 동행하고, 서로 등을 돌려온 세상에 각자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나누는 말동무였다.

이슬비는 세상을 떠돌던 하늘의 이야기를, 나는 세속을 떠돌던 문명의 이야기를 나눴다.

작은 감탄이라도 낯선 이야기는 감동이 될 수 있고, 작은 기쁨이라도 서로 다른 세상에선 희열이 될 수 있다.

이 길을 걷는 한 유연하고 아름다운 곡선은 지칠 줄 모른다.

길의 남쪽으로 첩첩 산능선은 이어졌다.

멀리 장벽처럼 우뚝 솟은 백두대간의 위용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떠받쳐 줄까?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가을이 점점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지나친 분들과 반가움을 나누며 다시 각자의 길을 가며, 달디단 고독의 맛을 곱씹었다.

잡념도,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몰입 상태였다.

또르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굽이굽이 연결된 곡선이 이렇게 아름답고 미려할 수가 없다.

하늘숲길, 운탄고도, 하늘길...

이왕이면 모두가 하나의 이름표를 달았으면 어땠을까?

이 길 구간 마다에도 선명한 별칭이 있다면 더 친근하겠다.

문득 걷던 중 지나친 작은 광산과 삶에 지친 광부를 만났다.

광산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6년 전엔 없었다.

놓칠 수 없는 무거운 일상의 발걸음과 그 걸음을 무던히도 부르던 광산의 사선이 만나 험준한 산세에 위대한 자취로 남긴 이 길은 영혼의 징표이자 파란만장한 과거의 기록이었다.

먼지로 검게 그을린 주름 너머 하얗게 피어나던 미소는 또한 어디로 갔을까?

막장이야기.

허나 모든 희생과 가장은 숭고하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무거워진 발걸음을 애써 옮기지 않았다.

하늘숲길로 출발한 지 대략 5km가 지나 과거 추억을 묻는 도롱이못에 다다랐다.

한창 작업 중이라 많은 분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동안 잠시 앉아 시간을 감상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며 쇠퇴할지언정 자연은 쇠락을 모른다.

문득 6년이란 시간이 내겐 삶의 전장이었다면 자연에겐 성숙의 변태를 거친 통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다지도 무심히 달려왔을까?

허나 우울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인연과 추억들로 인해 아름다웠으므로.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충실하고 진지했을 터, 그 깨달음으로 인해 잡념을 잠시 묵혀 두고, 현재에 충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시간의 연결 고리로 인해 다듬는 미래는 현재와 과거라는 조각칼을 쓸 수밖에 없다.

함께 과거를 엮어준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도롱이연못은 6년 전 모습 그대로다.

연못 속에 비친 세상도, 밟고 서 있는 세상도 평화롭기만 했다.

도롱이는 크게 달리진 것 없었는데 아롱이는 완전 달라졌다.

원래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았었는데 차로 밀어붙여 길을 터놓았다.

정점을 찍고 돌아가는 길에 만난 한 쌍의 새.

이쁜 노랫소리에 귀를 귀울여본다.

화려한 불꽃을 태우는 가을, 결 고운 빛깔을 어떻게 잊을까?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할 즈음 하늘숲길 여행은 마침표를 찍게 되는데 얇은 방수 재킷에 이따금 닿는 빗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청량감을 선사했고, 그로부터 다음 여정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덧붙임) 정선 사북으로 출발하는 날, 회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그 분이 담당하신 2개층 직원들이 모두 조기 퇴근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나는 불안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증상이 발현되면 안심이 될 때까지 정선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다행히 추가 확진자는 없었고, 나 또한 그분과 직접적인 동선은 겹치지 않아 여정이 끝날 무렵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코로나19의 공포가 감염병보다 더 강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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