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시간이 주어 졌음에도 나는 주제 넘게도 무리한 여행 계획을 세웠고 비웃기라도 하듯 출발하는 저녁 시간부터 계획이 어그러져 1박의 여행은 그저 한적한 곳에서 잠이나 자고 오는 반쪽 짜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출발하는 이른 저녁 시간에 기습적으로 내린 비는 사실 가는 길조차 나의 단념을 부추겼으나 평일 한적한 시간에 쉽지 않은 결단이었던 만큼 강행의 깃발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번 만큼은 게릴라식 여행이라 3주 전에 미리 예약해야만 하는 회사 복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없었지만 평일의 혜택은 모든 숙소가 단기 비수기라 아쉽긴 해도 주말 휴일에 비해 저렴하다는데 위안 삼아야 했다.
충주 켄싱턴 리조트는 그나마 집에서 접근이 용이한, 여행 기분을 충족하면서 이동 거리가 짧은 곳인데다 충주는 이미 친숙한 여행지가 되었기에 지도 없이 쉽게 찾아 갔다.
전날 해가 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도착 했으니까 무얼 하겠나 싶었지만 맥주 한 캔에 짱짱한 음악을 안주 삼아 늦은 밤까지 여행 기분에 몰입 하려 애썼다.
이튿날 느긋하게 일어나서 마운틴뷰 베란다로 나가서야 뒤늦게 후회를 완전 만회할 수 있었는데 여전히 남아 있던 벚꽃이 세찬 바람의 훈풍을 타고 허공에 빼곡히 날리며 남은 봄의 흔적들을 씻어 내고 있었다.
숙소를 정리하고 그 또한 느긋하게 자리를 박차며 산 아래 앙성을 바라 보노라니 시간이 필터링해 준 어중간한 기억은 말끔히 잊고 봄의 새싹처럼 파릇하고 아릿다운 추억만 회상된다.
그 기분이라면 내가 공들였던 시간과 자금에 대한 주판알을 퉁길 가치 조차 느끼지 않는데다 일상에 찌들었던 피로까지도 덤으로 미련 없이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전날 추적하던 흐린 날이 거짓말처럼 전형적인 봄의 화사한 날개로 펄럭이며 나를 유혹하는 그 손길은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맑은 대기처럼 추억을 더듬는데 있어 한치의 장막도 없이 생생하게 기억의 타래를 펼치게 해 주었다.
이미 10년 이상 지난, 안방 드나들 듯 충주와 여주를 오갔던 시절 이었지만 놀랄 만큼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고 다음 행선지에 대한 고민으로 미간을 찌뿌릴 겨를 없이 어느새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여주-부론 방향의 한적한 길로 달려 가고 있었다.
앙성을 지나 갈터고갯마루에 다다르자 한 그루 화사한 벚꽃이 지각한 만개를 송구스러워 하는 것처럼 절정의 화사한 손짓을 보낸다.
잠시 옆길에 차를 빼고 쏟아지는 봄햇살과 더불어 지나는 바람의 내음에 취해 보기로 한다.
넓직한 골을 따라 도로는 세심한 배려로 가장자리와 산줄기 사이로 꾸불거리며 내려가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골의 지형에 맞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이 평온이 넘친 나머지 나른하기까지 한 정취를 퉁겨 댄다.
미끄러지듯 사뿐히 도착한 남한강-섬강-청미천 두물머리는 여전히 많은 사연을 품은 포용력을 과시하듯 넓직한 강에 풍부한 수량을 담아 나를 맞이한다.(시간의 파고에도 끄덕없는 부론_20150307, 추억과 시간이 만나는 곳)
만물을 태울 기세로 봄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건만 뜨거움을 느낄 겨를 없이 강바람은 세찬데 모처럼 먼길을 감행한 수고로움을 토닥이려는지 바람 끝에 묘하게 봄의 향취가 후각 세포를 자극하여 잊고 지내던 기억까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 앞에 펼쳐 놓는다.
힘들었던 한 시기에 넋두리 편지를 써서 날리 보냈던 이 강산은 내 지친 등과 얼룩진 볼을 얼마나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었던가!
설사 늦은 밤에 오더라도 이 강은 잠자던 바람을 깨워 사지에 젖어 있던 땀까지 훔쳐 가지 않았던가!
용기를 내어 강가로 내려가 찰랑이는 강물을 만져 본다.
2년 전 녹조로 악취를 풍기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황폐해진 수 많은 직선들을 유연한 곡선들로 되돌려 놓았다.
전날 내린 비가 왜 출발 전에 곳곳을 뿌려 적셔 놓았는지 이제서야 이해를 하다니.
변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그대로 돌려 놓고 씻겨야 될 것들은 비의 힘을 빌려 말끔히 지워 잠시 자리 비웠던 자연은 원망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제 할 일만 해 놓았다.
늘 동경하면서 닮기로 했건만 얄팍한 내 인내를 훈계 한 마디 없이 기다려 줬음에 다시 고개를 떨구고 이내 쳐진 어깨를 추스른다.
이왕 실컷 걷고 바람을 안을 거라면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고 같이 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 볼륨을 올리자 허밍하면서 건조한 음악에 윤기를 실어 주고 평면적인 곡조에 일일이 색깔을 입혀 준다.
그칠 줄 모르는 강물과 바람의 파동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도 어쩌면 한 푼의 싫은 내색 없이 손짓을 해 주는 여유까지 여운으로 가슴에 챙겨 주는 그 새로운 기억을 나는 여전히 챙겨 받기만 했다.
이 드넓은 아량의 잣대를 사진으로 담기엔 참 부족하고 늘 미안하다.
그래도 한결 같이 덤덤히 맞이해 주는 그 안락한 가슴의 여운에 무거워진 발걸음을 일갈의 희망으로 단장하고 반복되는 기약을 남겨 둔 채 자리를 떠났다.
궂은 날씨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짖누르는 아쉬움은 도대체 특효약이 무얼까?
늘 여행의 길에서 느끼는 증상이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의 설렘으로 가장하고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 올 수 밖에 없었고 달콤하면서 몽환적인 단잠 같은 봄은 야속하게도 내 바램을 애써 무시하듯 하루가 지날 수록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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