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깊고 포근한 잠을 청하고 일어나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한 뒤 커피 한 잔을 내려 손에 들고 창을 열어 젖혔다.
만추의 서늘하고 세찬 바람이 요란하게 방충망을 흔드는 소리와 투숙객들이 분주히 차를 몰고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소리가 뒤섞여 집을 떠나 여행지에 온 기분이 새삼 들었다.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면서 바람에 실린 낙엽들이 날려가다 하나가 방충망에 걸려 떨어지지 않고 지나는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비교적 낙엽이 방충망에 단단히 걸려 버렸는지 이후에도 바람에 흔들릴 뿐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매달려 바람 소리에 반응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던 낙엽이 자연스레 걸린 거라 이 장면을 두고 머그잔에 커피가 비워지길 기다렸다 바로 숙소를 나서 영동고속도로와 나란히 뻗어 있는 지방도로를 타고 월정사로 향했다.
횡계가 높은 지대다 보니 월정사로 가는 지방도로는 차량의 엑셀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지속된 내리막길이었고, 어느 순간 길이 평탄해지는 시점에서 월정사로 빠지는 교차로에 다다랐다.
월정사가 가까워질수록 차량은 급격히 늘어나 긴 꼬리를 물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진행 속도가 더뎌져 이미 도로 양옆에 길게 늘어선 주차된 차들이 있었고, 더불어 거기서 부터 도보를 이용해 월정사로 걷는 사람들도 많아 가던 방향으로 좀 더 진행하다 식당이 즐비한 큰 주차장에 멀찌감치 차를 세워 두고 걷기로 했다.
도로를 따라 길게 서행하는 차량도 무척 많았지만 그 도로를 따라 양옆으로 걷는 사람들도 많은 걸 보면 떠나는 가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월정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그나마 주차장 일대 전나무들은 여전히 녹색 이파리를 가지고 있어서 아직 가을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발걸음을 재촉 했고, 전나무길 초입에 들어선 단풍은 아직도 절정의 빛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차례 인파가 빠지고 살짝 조용해진 틈을 타 빨간 단풍 너머 햇살을 바라보자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졌고, 지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 자리를 맴돌며 흩어져 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달랬다.
하늘 향해 한껏 뻗어 있는 전나무의 곧은 자태에 길 초입부터 터져 나오는 감탄을 애써 삼켰지만 시선 만큼은 연신 빼곡한 전나무로 향했다.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한길 가에 사람들이 모여 뭔가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고, 호기심을 참지 않고 거기로 다가가자 다람쥐 한 마리가 사람들 손길은 아랑곳 않고 열심히 식사 중이었다.
걷던 길 우측으로 난 숲길이 한길에 비해 한적하다 싶어 그 길을 따라 가자 두터운 낙엽이 쌓인 정원 같은 길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런 한적한 정취와 달리 거기엔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며 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무얼 골똘히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던 중 그 이유를 이내 알아 차렸다.
낙엽으로 쉽게 보이지 않던 다람쥐가 어디선가 출몰하는데 그 수는 의외로 많았고, 사람들에 대해 전혀 경계심 없이 활보하고 다녔다.
사진을 찍으려고 서 있던 자리에 앉아 셔터를 눌러 대는데 많은 다람쥐들이 나타났다 이내 사라지거나 낙엽 위를 뛰어 다니다 한 녀석은 내 발등을 밟고 지나며 정신 없이 주위를 멤돌다 또 다른 녀석과 추격전까지 벌이던 중 내게 부딪힐 뻔한 상황을 교묘히 피해 다시 어디론가 쏜살처럼 숨어 버렸다.
쫓던 녀석도 이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돌아다니며 보물찾기 놀이에 심취해 있었고, 그런 모습들에 취해 한동안 자리를 뜰 줄 모르다 정신을 차고 다시 가던 길로 출발했다.
깊은 산중이 아니라 이따금 만나는 가을 정취는 확실히 만추로 접어든 날씨에 비해 아직은 의외다 싶을 만큼 소소히 남아 있었고, 그 자리엔 어김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셔터 소리로 가득했다.
많은 여울이 산에서 틈틈히 내려 오는 길목엔 벤치가 있어 운치 있는 휴식 공간을 제공해 줬다.
은근 이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건 여울을 손대지 않고 그 가장자리에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월정사가 워낙 유명한 사찰이라 개발의 홍역은 피할 수 없지만 있던 걸 없애거나 사람의 이기로 완전 가공하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자연에 살짝 자리를 빌려 인간이 다가설 수 있게 만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다리를 보니까 월정사가 바로 코 앞이구나.
월정사에 들르지 않고 옆 담장길로 계속 걷자 단풍이 늘어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한결 같이 유혹 했고, 그 길을 지나는 어느 누구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단풍의 향연에 빠져 들었다.
발 밑에 낙엽이 자욱하긴 해도 아직 빨간 물이 들지 않은 단풍 이파리가 많아 마치 이 길만 놓고 보면 절정에 들어선 가을의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산에서 불어 오는 약한 바람을 타고 매력적인 가지를 흔들어 대는 통에 가을의 정점이라 착각한들 나쁠 거 없잖아.
월정사를 지나쳐 다시 전나무가 빼곡한 상원사로 향한 숲길은 이전과는 달리 길이 한층 좁아지고 바닥이 울퉁불퉁 해졌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산길 마냥 길바닥이 제각각인 돌과 지면의 기복이 심한게 아니라 월정사 길 자체가 워낙 말끔하고 넓직하게 뻗어 있어 거기에 비한다면 지면이 안 좋을 수 있지만 다른 산길에 비한다면 여전히 길의 형태는 뚜렷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확실히 주위 풍경이 좀 더 깊은 산중으로 바뀌어 있는데다 가을 정취가 거의 증발하고 만추의 마지막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는 내내 푸르던 전나무가 어느 순간 노랗게 변하고 길바닥은 전나무 낙엽들이 쌓여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었고, 숲속에도 벌써 앙상한 가지를 매달고 있는 나무도 많이 눈에 띄였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낙엽이 초겨울 눈처럼 가늘게 떨어졌다.
길은 부쩍 좁아져 전형적인 산길의 품새로 바뀌었는데 대신 길 양 옆 빼곡한 숲으로 인해 걷는 내내 피로감을 잊고 주위 풍경에 취해 쉼 없이 올라 갔다.
길은 오대천을 따라 계속 이어졌는데 중간중간 강을 건너거나 두 갈래로 헤어졌지만, 이내 다시 모이고 오대천을 만나 아무 일 없었던 마냥 오대천과 함께 구부정히 뻗어 있었고, 처음 출발할 때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어느 순간 한적한 산길의 모습을 되찾았다.
길 중간중간에 이런 특이한 돌뿌리와 세상 굴곡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여러 모양으로 꼬부라진 나무가 쉴 새 없이 서 있고, 비록 공기는 서늘 했지만 잦아든 바람과 남은 가을 정취로 날씨는 포근하게 느껴졌다.
주차를 해 놓고 길을 따라 올라 온 지 2시간 가량 지났을까?
오대천에 매끈하고 너른 바위가 보이자 출발하고 나서 한 번도 쉬지 않았던 휴식을 취하며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텀블러 커피를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자 드문드문 사람들이 나처럼 바위에 걸터앉아 기나긴 산책 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마음은 가을 정취에 흠뻑 젖어 피로감을 토로하는 표정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삼삼오오 모여 함께 이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간 밀어 뒀던 대화로 얼굴엔 함박 미소가 그득했다.
앉아 있던 바위의 발치엔 세찬 물이 흘러 마치 길을 따라 걸으며 차곡히 쌓였던 피로감을 시원한 물줄기가 씻는 것만 같았다.
20분 정도 바위에 걸터앉은 자세로 편하게 쉬다 하염 없이 흐르는 시간에 번쩍 정신이 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무숲을 둘러 보자 처음과 달리 한층 깊어진 만추의 풍경을 알아 차렸고, 왔던 길을 따라 오르더라도 가을은 점점 엷어질 게 뻔해 왔던 길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시간 즈음해서 길을 따라 상원사로 향하는 사람들보다 월정사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압도적이라 잰걸음으로 서둘렀다.
월정사에 들어서자 상당히 많은 사람들, 특히나 단체로 방문한 사람들이 석탑 주위에 몰려 있었고, 오를 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갔음에도 월정사 주변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 생수 한 컵을 떠서 갈증도 삭히고, 지인들께 드릴 기념품 몇 가지를 구입 하며 잠시 머무르는 사이 시간은 꽤 흘러 해가 뉘엇뉘엇 질 기세라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왔던 길이 너른 전나무 숲길이었다면 내려가는 길은 오대천 넘어 데크가 놓여 있던 길을 이용했는데 다리를 건너던 중 특이한 이끼가 눈에 띄였다.
산중 풍경이라 허투루한 게 뭐가 있겠나.
늘 감사한 은사 같은 가을은 이미 만추로 접어든 강원도의 서늘한 한기에도 오늘은 그나마 내일이나 모레보다 포근하고 가을색 또한 짙게 남겨 둔다.
설령 낙엽이 뽀얗게 바닥을 뒹굴어도 여전히 남은 이파리가 달려 있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대기가 뺨을 자극해도 겨울에 비할 바 있을까?
유명 인사가 된 전나무숲길은 주말을 맞아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숭고한 전나무가 내어준 공간에 들어선 순간 모든 이목을 잊은 채 찬연한 숲과 계절에 압도당한 나머지 극한의 몰입으로 내몰렸다.
내가 걸을 수 있고, 이 길을 밟을 수 있다는 건 아직 건강하다는 반증이고, 이런 감정과 감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건 아직 건재하다는 인증이다.
월정사는 유구한 전통과 뿌리 깊은 신앙에 기대어 역시나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져 설사 내가 종교를 불신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의 성숙과 침묵의 경건함은 새겨 놓을만 했다.
만추가 빚어낸 전나무의 퇴색은 소나무와 달리 동면을 예고하는 낙엽비를 쏟아 내지만 어쩌면 표현 방법만 상이할 뿐 한 단계 성숙과 진화를 위한 동면 수순으로 봤을 때 차라리 풍성한 가을의 운치를 불태운다.
17km 조금 넘게 걸으면서도 피로를 느낄 새가 없었던 산책 이자 떠나가는 가을 배웅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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