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사라진 광산마을, 상동_20150912

사려울 2015. 10. 21. 00:33

동화처럼 단아했던 모운동을 뒤로 한 채 더 깊은 산중으로 뻗어난 한길의 끝엔 또 다른 한 때의 부귀를 누리던 탄광마을이며 오늘의 최종 목적지였던 상동이 있었다.

한때 세계 텅스텐의 10%가 상동에서 채굴되었고 산골을 따라 4만명 이상의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는 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정보인 만큼 과거의 시간들이 난 그리웠었나 보다.

모운동이 어느 순간 과거의 시간을 완전히 씻어 버렸다면 상동은 그 시간을 그대로 붙잡아 둔 채 흔적들마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어쩌면 모운동에서의 아쉬웠던 기대감을 상동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언덕길에 축축히 젖은 흙조차도 제대로 재현했다.

 

 

모운동에서 상동으로 가는 길은 역쉬나 높은 산들이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에 살짝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상동의 높은 산들은 구름조차 걸려 있는 꼬락서니 보게나.

 

 

가던 길, 모퉁이를 돌아설 무렵 마치 입체감에 의해 멋진 소나무가 버티고 있는 언덕이 보인다.

속리산 정이품송 못지 않은 자태에 그 소나무를 떠받들고 있는 언덕이 있어 탄성을 내뿜게 되는 그 고갯길은 소나무가 지키고 있어 솔고개라 부른다.

지나는 길자락에서 본 모습은 밑으로 쳐지는 자태 였으나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언덕이 있어 그 품새가 감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나무와 그걸 떠받히는 언덕도 장관이지만 그 주위 풍경 또한 옹고집으로 숨겨 놓은 보배 같다.

 

 

소나무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 아래에도 이렇게 걸어가 보고 싶은 길들이 있는데 어느 하나가 뛰어 나다 단언하기 전에 이 모든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소나무 언덕 너머는 그 자태를 억겁동안 지켜봐준 단풍산이 있고 그 신비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려는 구름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세월의 풍파를 만날때마다 곡선이 가미되어 가지가 뒤틀리고 밑으로 쳐질지언정 하늘을 향한 갈망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이 차디찬 서리처럼 싸늘한 통증으로 새겨져 번뇌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그 자태는 매끈함과 곧음보다 더 대견스럽다.

깊은 산중의 길목에 있는 이유가 다분하다.

인생의 깊은 고민을 겪은 자들이 선택했던 상동행은 기대와 절망감이 끊임 없이 교차하는 생활이 되었을 터, 천가지 생각과 만가지 표정을 가진 나그네의 표정을 얼마나 많이 봐 왔을까?어쩌면 무더운 여름에, 급작스럽게 뿌려대는 소나기에 그늘과 우산도 자처했을 것이다.짧지만 많은 생각과 주름에 잠긴 소나무이기에 어눌한 가로수와 비유할 수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소나무의 자태에 반해 늦게 도착한 상동은 가장 선명히 각인되는 꼴두바위가 있다.

늘 그렇듯 선조들은 주위 사물 하나하나에도 전설로써 의인화하여 지상 모든 고장 골골이마다 이름을 부여해 이웃처럼 대했는데 꼴두바위 또한 아리랑 못지 않은 슬픈 사연이 있단다.

 

 

지금은 매끈하게 가공된 꼴두바위 공원이지만 시간처럼 흐르는 물도 마냥 붙잡을 수 없나 보다.

떠나 버린 사람들의 발길이 그립고 사무쳐 눈물이 고인 양 찾아오는 가을을 품은채 흐르려 하지만 어디로 갈지를 몰라 방황의 귀로에 서 있다.

공원으로 올라오시던 허리가 불편해 구부정하게 걸음을 옮기시던 어른 한 분이 나를 보시곤 방향을 꺾어 어색한 걸음을 재촉하신다.

그 분과 스치듯 지나쳤지만 난 모처럼 만난 지인처럼 익명의 반가움을 담았다.

 

 

상동 거의 끝자락과 같은 위치에 꼴두바위 공원이 있는데 거슬러 왔던 길을 다시 추스려본다.

급격한 골과 높은 산을 피해 연신 휘청이는 좁은 도로가 이토록 넓고 매끈하게 보일까?

 

 

꼴두바위에서 태백을 바라보면 끝간데 없이 치솟아 구름조차 뚫어 버린 산세를 역산할 수 있다.

서서히 땅거미가 드리우고 해는 서산으로 지려는데 나는 발걸음을 뗄 수 없어 한참을 서성이다 지나온 아랫동네를 다시 서성이기로 했다.

 

 

말끔하게 다듬은 버스터미널과 광장은 누굴 기다리려는 걸까?

텅빈 정적을 뚫듯 시계방 앞 수도꼭지에 물은 첨예하게 허공을 가르고 사방으로 천방지축 뻗어나간다.

 

 

 

사람들이 떠나 버려 이미 불빛이 들어차야 될 내부는 암흑 뿐이다.

간판과 통유리에 붙여 놓은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설레였을 텐데 이제 그 설렘이 떠나자 그 글들을 버리고 주인장들은 또 다른 설렘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언제 오리라는 기약조차 없건만 그 글들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종내는 외벽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는 굳건한 다짐 같다.

 

 

화려해야 될 불빛이 도리어 초라하고 처량하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그래도 아직은 남은 미련처럼 가로등이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일까?

 

 

이미 어둑해진 거리를 걷다 보니 사방이 금새 열기가 식어 버렸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경계의 눈빛을 보여 응수의 시선을 보냈더니 번개처럼 창 넘어 자취를 감춘걸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란 거다.

 

 

길을 걷던 중 주택가의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올라가 봤더니 번창했을 당시 빼곡한 집들이 엉성하게 증발하고 집터만 남아 질척한 흙이 덮혀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 너비의 뒷골목을 지나오면서 금새 알 수 있는 인척과 빈집.그래도 가끔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티비 소리를 들으니 오싹하던 느낌이 따스하게 위로가 된다.불과 한 사람이 겨우 잘 수 있는 작은 방이 쪽창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데 어둑한 불빛을 안주 삼아 소주 한병을 비우는 어르신 모습이 아직도 악몽처럼 선명하게 울려 댄다.구멍가게에서 무거운 졸음이 와도 억척스레 떨치고 천연덕스럽게 손님을 맞던 주인과 그 기다림에 익숙한 주인을 마주했던 손님.여러 채널의 티비소리와 희노애락이 실린 목소리들, 그리고 밤을 밝히던 등불과 음식을 조리할때 내뱉던 내음들이 골목으로 뛰쳐 나와 한데 어울리던 사람 살아가는 잔해들.이제는 그리움이 되고 아쉬움이 되어 도저히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들과 풍경들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시간들에 떠밀려 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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