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문명에 대한 결초보은, 말티재_20210121

사려울 2023. 1. 15. 18:46

어느덧 가을 명소로 자리 잡은 말티재는 문명의 해일에 용케 버틴 공로처럼 불편하게 꼬불꼬불한 고갯길에 묘한 경이로움과 곡선의 안락함이 교차한다.
코로나로 인해 전망대는 굳게 자물쇠가 걸려 있지만 그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가을 명소 답게 이 친숙한 고갯길에 단풍이 어울려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가 내려 텅빈 고갯길에 서서 힘겹게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구름조차 쉬어갈 만한 멋진 풍경, 결초보은 말티재의 마력이다.

속리산에서 말티재 진입 전 공영 주차장에 차를 두고 하나씩 훑어보는데 입소문에 맞춰 보은에서 공을 들인 흔적이 많다.

지루하게 내리는 빗방울로 카메라는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간소한 차림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간다.

말티재 전망대 카페는 텅 빈 고갯길과 다르게 내부에 손님이 몇 팀 있다.

말티재 터널 위 산책로를 따라서 걷다 만난 첫 이정표.

하나의 길을 택해 걸어가자 터널 위에서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무성한 자리에 퇴색된 잡초와 함께 어렴풋 산으로 향하는 길이 있어 옆으로 빠져나와 전망대가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코로나19로 자물쇠로 굳게 닫힌 전망대 위치가 절묘하다.

말티재 일대를 배회하다 비를 피할 겸 전망대로 가자 그 아래에서 말티재 진풍경이 보였다.

하루 숙소로 선택한 국립 말티재 휴양림은 보은에서 얼마 가지 않아 말티재 초입 장재저수지를 끼고 진입하면 되는데 휴양림 내 임도가 말티재 하부와 연결되어 있어 주차한 뒤 임도로 걸어 보자 마음먹었다.

휴양림 통나무집 가까이 임도를 찾지 못해-알고 보면 바로 옆이었는데- 산 언저리 오솔길로 올라가자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또한 궁금해 우선 길 따라 계속 걸었다.

어느 지점부터 길은 꺾여 말티재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솔길 옆에 작은 구덩이는 나무가 뽑힌 자리 같다.

오솔길 따라 쭉 진행하자 휴양림 내 임도가 발치에 보였고 그 길로 임도에 합류, 길은 차 한 대 너끈히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걷기 좋았고, 급히 오르거나 내리막 없이 완만하게 산을 크게 돌아 말티재 방향으로 줄곧 뻗어 있었다.

가던 길에 한 분과 마주쳤는데 말티재를 여쭤보자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길 따라 쭉 가다 보면 알 수 있단다.

그래서 길 따라 계속 진행, 길 좌측은 보은 방향으로 트여 있어 이 자체로도 걷는 동안 지겹거나 힘겹지 않았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을 끼고 우측으로 꺾이며 정면에 말티재가 한눈에 들어찼다.

바삐 세상을 질주하던 구름도 인간이 그려놓은 곡선을 감상하느라 세상을 향한 강박증을 잠시 내려놓았다.
해 질 녘 그칠 줄 모르는 비는 그런 세상을 시기하는지 더욱 굵고 빼곡한 훼방을 놓지만 현실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그마저 적막한 산길을 동행하는 자연이 되고, 산 언저리 따라 구부정 휘감는 길은 잔치집 마당 디딤돌이 되어 풍성한 장작 내음으로 맞이한다.
텅 빈 산길 조차 과하게 매끈하던 말티재 쪽길 따라 잡념은 사념이 되고, 비와 바람 소리는 잡음이 아닌 한줄 가락이 되던 날,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이 희열로 보은 하던 날이다.
그래서 보은인가? 

말티재를 넘으려던 구름이 그 자리에 멈춰 두리번 거린다.

이 또한 하늘로 승천하기 전, 말티재를 읽기 위함일까?

점점 하루 등불이 꺼지고, 빗방울이 거세져 어느 시점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숙소에 도착한 뒤 밤새 거센 비가 내려 이번 여정의 마지막 밤을 위로해 줬다.

 

 

다른 휴양림에 비해 규모가 작고 꾸며진 것들이 소소하지만 그 일대는 결코 단조롭지 않은 곳, 가장 높은 곳이 숙소였는데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고 계단을 통해 무거운 짐을 옮겼다.

그래도 괜찮아.

난 여전히 건강하고 마음이 밝아서.

고마운 쉼터가 되어준 휴양림을 떠나며 남은 여운에 뒤 돌아 인사를 전한다.
잠자리를 가리지 않아 등만 기댈 공간이라면 숙면을 취하는데 특히나 잠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던 곳이라 첫 인연이 인상 깊다.

 

 

보은에서 돌아오는 길은 그물처럼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편하게 올 수 있었지만 그 정갈한 방법을 버리고 국도 따라 길목에 있는 초정리에 들렀다.
제약회사 근무 시절에 교육이 있어 인근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물의 가치를 얕잡아 보았던 만큼 당연히 필요성도 못 느꼈고,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가족들과 한 번 정도는 좋은 물을 마셔보자는 의지로 40여 분을 달려 초정리에 도착했다.
봉화를 지나던 길에 다덕약수를 한 통 떠오자 꽤 반응이 좋았던 것도 한몫했는데 초정리 광천수는 붉은빛의 다덕과 달리 청명한 탄산수로 당도만 보충한다면 사이다와 같다.
어차피 많이 담아봐야 탄산이 날아가면 별 특징이 없어 9리터 물통에 작은 생수병 하나만 채웠는데 영락없이 흔하게 마시던 사이다 판박이다.
집에 돌아오자 정말 유명한 탄산수를 접하게 된 경이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 노력이 가상하야 북장단에 맞춰준 건지 몰라도 좋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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