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매향리에 상처를 딛고 평화의 바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원은 이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선량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여러 테마가 공존하면서도 그 접점은 결국 평화로 자연이 배제된 평화는 이기일 뿐, 마치 이 땅을 도화지인 양 자연의 붓으로 그린 그림에 하나씩 동화되어 가는 쾌감에 폭염도 잊었던 순간이었다.
더불어 주옥같은 작품과 땀방울이 알알이 들어차 있어 시를 읽는 마음으로 천천히 하나씩 가슴에 새겼다.
매향리 평화생태공원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 있는 자연 생태공원으로 과거 54년간 미 공군 사격장[쿠니사격장]으로 사용되면서 미군의 공중 사격훈련으로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겪었던 과거의 아픔과 훼손된 환경을 치유하고, 외부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조성되어 2021년 7월 완성되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국 군대가 매향리 앞 농섬을 해상 표적으로 삼고 사격 연습을 시작하였고, 1954년 미국 군대가 본격적으로 매향리 해안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 내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한미행정협정·SOFA]」 제2조에 근거하여 폭격훈련장이 설치되었으며, 1968년에 958,677㎡ 규모의 마을 농지에 육상 사격장을 조성하면서 ‘쿠니사격장’이 완성되었다. 해당 농지는 주한 미군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가 1968년 징발한 것이며, 1980년 해안 지역의 농지를 추가로 징발하면서 719만평 규모의 미국 공군 훈련소가 조성되었다. 사격 훈련과 폭격 훈련이 54년 동안 이어지면서, 소음 및 환경 공해로 인한 피해 뿐만 아니라, 오발탄과 불발탄으로 인하여 인근 주민들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989년 3월 주민 1천여 명이 사격장 이전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3주간 벌였지만, 미국 공군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강행하였다. 1994년 12월에는 쿠니사격장에서 불발탄 제거 작업 중 폭발 사고로 주민 11명이 다치거나 놀라 치료를 받았으며, 90여 채의 가옥과 기아자동차 아산공장 건물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가 있었다. 2000년 5월 8일 포탄 6발을 매향리 앞바다 사격장에 동시 투하하면서 인근 주민 7명이 대피하다가 다치고, 농가 수백 채의 유리창이 파손되는 오폭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격장 폐쇄와 한미행정협정[SOFA]에 대한 개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000년 8월 국방부가 ‘매향리 사태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지상화기 사격 훈련이 전면 중지되었다. 주민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2001년 4월 1억 3천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으며, 8월에는 주민 2,371명이 추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4년 3월 주민 14명에 대한 국가 배상이 확정되었고, 이후 주민 1,899명에 대한 2차 손해배상 소송에도 81억 원의 배상 판결을 받으면서 쿠니사격장 폐쇄가 결정되었다.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내 쿠니사격장 존치건축물 문화재생사업 및 평화기념관 건립공사를 진행 중이며, 2022년 1월 현재 미완공 상태이다.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옆에는 2017년 5월 개장한 유소년야구장인 화성드림파크가 있다. 매향리 846일대의 24만 2,689㎡ 부지에 8면의 야구장과 주차장·관리동 등의 지원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매향리 666-4에는 주민들이 피해 보상 승소금을 모아 2007년 조성한 매향리 평화역사관[매향리 역사 기념관]에서 총알 흔적이 남은 전시물과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와 조각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출처] 매향리 평화생태공원_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지도를 보던 중 문득 그림처럼 채워진 서해안의 너른 공원이 눈에 띄어 직접 찾아왔다.
처음엔 폭염이 걱정이었지만, 그런 장애를 가뿐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 그런 곳이었다.
화성이 넓다는 걸 또 한 번 느낀 게 같은 화성임에도 동쪽 끝에 위치한 동탄에서 서남쪽 끝에 위치한 우정읍까지는 한참 달려 도착했고, 작은 야구장 8개가 모여 있는 화성드림파크를 바로 지나면 최종 목적지인 매향리 평화생태공원이 자리했다.
무척 넓은 주차장에 태양광 집열판 아래 차를 주차하고 공원으로 향하는데 어찌나 넓은지 어디에서 출발해야 될지 살짝 결정 장애도 왔다.
주차장과 접한 너른 잔디광장에 이끌리듯 ‘잔디마당’을 먼저 찾았고, 천천히 거닐며 전투적인 일상을 잊을 수 있었다.
또한 공원의 모든 인위적인 것들은 자연을 주재료로 만든 작품들이었는데 공간 하나하나가 공산품 형태의 찍어낸 게 아닌 모습이나 주제를 달리했다.
거대한 ‘잔디마당’ 옆 특이한 건축물인 평화기념관과의 조합이 꽤 독특했는데 철조망이 가로 놓여 바로 진입할 수 있어 크게 한 바퀴 둘러본 뒤 철조망 가까이 이어진 길을 걸어 잔디마당을 벗어났다.
폭염도 잊게 만드는 광경.
수평적인 잔디마당에 우뚝 솟은 나무와 그 아래 작은 쉼터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이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었다.
명확한 테마로 여러 작품을 전시한 공간.
‘작가정원’으로 자리를 옮기던 중 정적인 공간에 적막을 깨는 물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꽃밭에 물을 주는 소녀.
매향정 앞 반달 모양의 연못을 포함한 작품들을 가장 먼저 만났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너른 공원을 채운 작은 하나하나의 작품들.
매향정 옆 전통을 상징하는 단지가 널려 있었는데 그렇다고 장독대의 토속적인 한계에 속박되지 않았다.
재래적인 흙담과 담장 안의 정원.
마당이 있다면 들이고 싶은 작은 정원들을 연이어 만나게 되었는데 주변에 흔한 소재들이 만나 특별한 하나가 되는 작품들의 연속이었다.
흙담을 관통하는 입체적인 작품도 빼놓지 않았다.
작은 정원을 빠져나오며 소담스런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 보며 가슴속 욕망의 창고에 담았다.
이번 작품명은 매향연화.
작가적 상상에 동경을 접목했다.
매향연화는 매화 향기 퍼지는 아름다운 봄의 경치를 뜻한다. 상처 입은 매향리의 자연이 본래의 경관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간조 때 열리는 매향리 앞 바닷길은 정원의 동선과 구조로 재구성된다. 정원의 배경이 되는 언덕 지형은 사라진 매향리 앞바다의 사구지형을 재현한다. 매향리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의 짙은 색감은 정원의 주요한 질감으로 표현된다. 폭격의 대상이었던 매향리 앞바다의 섬들은 부서지는 바위가 되고, 그 위에서 피어나는 봄꽃은 자연성의 회복을 상징한다. 매향리 어촌마을의 핵심적인 경관 요소이자 폭격의 상징과도 같았던 ‘농섬’의 형태와 질감은 정원의 메인 오브제인 조형 벤치로 재구성된다.
작품 속에 작은 울타리 안 세상에서 길이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자연은 어떻게 재편되고,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했는지.
결국 중심은 자연 위에 펼쳐질 그리움과 평화였다.
이런 자리에선 잠시 앉아 주변을 세세히 둘러봐야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떠나며 바로 옆에 이어진 ‘전시마당’으로 향했다.
이어 향한 미군 주둔지와 기념관.
박물관, 메모리얼의 M을 파동으로 형상화하여 소음 파동은 상쇄하고, 생명의 심장 파동을 형상화했다고.
8월 개관 예정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과거 미군기지의 폭력적인 상징성을 조화와 평화의 이미지로 탈바꿈하여 초소는 전망대가 되고, 군영은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자연의 관용은 그걸 공감의 대답으로 불타고 잘려진 나무에 새로운 싹이 솟았고, 살구나무엔 열매가 맺혔다.
이제는 높은 곳에 올라 적이 아닌 관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였다.
과거 미군기지는 평화생태공원의 여러 구성요소들 중 이질감을 떨쳐낸 구성원인 쿠니메모리얼가든으로 재탄생하였다.
폭력의 근원지에서 만남의 집합소로…
타고 잘려진 나무에서 새 생명이 움튼다.
감시초소가 전망대로, 적군 탐색을 위한 날카로운 시선에서 자연 관망을 위한 덤덤한 시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철계단을 오르자 연달아 쳐진 거미줄이 피부에 닿았다.
전망대에서 낙조를 준비하는 서해는 평온했다.
반대편 기념관 또한 조화로웠다.
벽돌 건축물의 철제 난간에 서서 바다와 내륙을 휘리릭 둘러보고 내려왔다.
내부는 출입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둘러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있던 살구나무에 탐스런 과실이 맺혀 이제는 평화의 신선함과 달콤함이 깃들었다.
멀리서 봐도 제법 규모가 있었는데 막상 그 앞에 서면 체감되는 규모가 더 웅장했고, 특히나 높게 솟은 기념관 타워는 파동을 형상화했는데 하늘로 솟구치는 음파로 유추할 수 있었다.
박물관과 메모리얼 이니셜 M.
굳게 걸어 잠긴 출입구 앞에 죽은 까치 하나.
고통 받아왔던 주민들과 더불어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까치 또한 측은했다.
기념관과 주둔지를 빠져나오며, 독특하고 웅장한 기념관의 모습을 멀찍이 다시 한 번 살펴봤다.
다음 찾은 곳은 각종 꽃들이 조화로움을 통해 어울린 ‘전시마당’
보라색 솜털 꽃잎이 매력적인 리아트리스.
앞서 둘러본 작은 정원에 비해 규모는 더 큰 자리에 꽃과 수풀, 그리고 암석이 뒤섞였는데 묘하게 조화로웠다.
단지 이쁜 꽃들로 채운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도 함께 용해되어 화려함보단 편안함이 느껴졌다.
꽃망울이 터지기 전 백합이 기대감을 부풀렸다.
큰 자리에 작은 것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상처가 있기 전 터주였던 자연을 기리는 의미도 빼놓지 않았다.
둘러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작은 단위의 꽃도, 큰 단위의 정원도 한결 같이 이쁜 정원 너머 매향리의 재탄생이 우뚝 솟았다.
역시 작가적 상상에 편견의 가두리는 의미가 없었다.
송알송알 거품이 맺혀 톡톡 터지듯 백일홍이 드넓게 펼쳐져 두 가지 표정으로 반짝였다.
백일홍에 질세라 뎁싸리는 가을 성숙을 위해 열 지어 꿈을 키우고 있었다.
잊으려 한다고 해도 상처는 일시에, 완전히 지울 수 없었는지 아물고 덮을지언정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여전히 기억의 흔적이 남았고, 시절의 말뚝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선 꿀벌들도 아주 천천히 백일홍 사이를 건너 다녔다.
사진 몇 컷 찍는 동안 마치 사진을 아는 것처럼 천천히 다니며 여러 포즈를 취했다.
아직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인간이 대체할 수 없었고, 그중 이 생명이 생태계에 족적 또한 인위적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
파괴의 역사에 비해 부활에 대한 역사와 노력을 보면 어찌 이 생명을 하찮다 단언할 수 있을까?
너른 들판 백일홍과 정원을 떠나 한반도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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