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던 시골 동네를 등지고 다시 도심에서 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군 복무 후 까지 9년 여 기간 동안의 시절이 각인된 추억의 장소를 찾기엔 그리 망설임도, 많은 거리를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걸어서 10여 km 이상을 이동했지만 생각보다 피로도가 쌓이지 않았고, 차가 아닌 도보의 장점으로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된 골목길을 이용할 수 있어 이동 거리도 적었다.
2017년 11월 30일 이후 추억 산책이라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앞서 하루를 보낸 추억 산책이 나쁘지 않았고, 이왕 마음 먹은 김에 시간이 허락될 때 마음 편하게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강행을 했다.
추억에 따른 시간 순서대로 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도보 거리가 지그재그로 뒤섞여 도중에 지치고 시간도 많이 걸릴 터라 한 지역에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걷기로 했다.
그래서 먼저 찾아간 곳은 중학교 3학년부터 고교 2학년 중반 정도까지 지낸 남부정류장 인근에서 시작했다.
도로 포장을 얼마 전에 했는지 아직 아스팔트의 흑빛이 온전한 이 동네는 인근 지역의 언덕배기에 아파트가 들어선 걸 제외하면 조밀한 주택 건물은 그대로 였다.
대부분 2층 건물에 1층은 상가 였고, 2층은 세대가 들어서 살았는데 골목집들과 달리 여긴 유동 인구가 많아 상가와 세대가 분리 되어 각종 가게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었다.
우리가 자주 가던 오락실을 비롯 여러 상점과 단골이던 테이프, 레코드, 음향 악세사리를 같이 팔던 전파사와 슈퍼마켓이 많았었지?
길과 연결된 골목만 들어서도 한적하고 온통 세대 였으니까 그 많던 소규모 상점들을 이용하면서 생활을 하던 시절은 지금에 비한다면 빈부격차도 거의 없었고, 재원의 분배도 골고루 이루어 졌다.
그 많던 상점 사장님들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할인이라는 명분하에 대형화된 마트와 쇼핑몰이 전국 곳곳에 무수히 많던 상점들을 문 닫게 해 버리기 전 불편함을 불편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다.
외부 유리창이 없던 시절에 살았던 2층 집은 중학교 3학년부터 고교 2학년 중반까지 살었던 집이다.
나무로 온통 도배된 실내는 단열 효과가 떨어져 여름이면 무쟈게 덥고, 겨울이면 입김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우풍이 심했다.
게다가 동네가 요상하리 만치 밤만 되면 오싹한 기운이 들어 고교 2학년 초가을 쯤에 인근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단다.
난 몰랐지만 가족 증언이 그랬으니까 그러려니 했고, 이 건물에 이상한 풍문이 있기도 했다.
또한 좀 도둑이 가끔 있던 곳인데 심증에 올라 있던 사람은 1층 쪽방에 살던 젊은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물증은 없었지만 가끔 심증을 뒷받침하는 어스름한 물증이 있었고, 큰 재물이 없어지지 않아 그러려니 넘어가 줬다.
그 좀 도둑님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아무런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은 추억의 한 장면이라 하겠다.
내가 다니던 고교는 살던 동네 가장 안쪽 산 언저리에 있다.
고1 여름방학이 지나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이전하기 전 학교는 한바탕 비가 내리면 운동장 전체가 호수 마냥 발목까지 물이 가득했다.
지금이라면 잠재된 위험으로 등교 조차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러려니 했던 시절이라 소위 죽지만 않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이 학교만의 문제만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엉성함이 만연한 시절이기도 했다.
이 정문은 비교적 뿌듯한 오르막길이라 대구의 살인적인 여름이 찾아올 때면 아침부터 온 몸은 땀으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물론 학교 교실에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고, 선풍기 2대만 유일하게 여름 나기의 아군이었다.
학교를 한 번 찾아가 계시는 분들 찾아 뵙고 싶었지만 이제 시작인 추억 산책이라 조금도 지체할 시간 여유가 없어 다음 기회에~
여러 꼬여 있던 골목을 거쳐 옆 동네로 이동하던 중 당시 건물이 고스란히 서 있던 동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남부정류장 바로 뒷편으로 2군 사령부로 가는 길목에 유일한 관공서이자 건물이기도 했다.
동사무소 맞은 편 인도로 걷던 중 연탄이 보인다.
도심에서 여전히 연탄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니!
아마도 몇 개 식당이 나열된 곳이라 식당에서 사용하는 흔적 아니겠나 싶은데 2015년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본 이후 처음이다.
어쩌면 이 녀석도 추억의 물건일 수 있겠다.
이번에 도착한 집도 2층인데 없던 유리 외벽이 생겼다.
여긴 앞서 남부정류장 인근에서 살다 고교 2학년 중반부터 약 5년 간 살았던 집인데 형편 없던 앞 전과 달리 여긴 건물 상태가 나름 준수 했다.
단열도 잘 되던 편이고, 집도 넓은 편인데다 과거 교수촌이란 명성 답게 동네 환경도 조용하면서 이상한 기운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엄청나게 아끼던 아이와 워크맨의 리모컨을 도둑 맞은 기억이 있던 곳이다.
한 때 좀 도둑이 자주 들락 거렸는데 베란다의 2중 창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걸 한참 뒤늦게 알고 그게 좀 도둑이 집안으로 들락 거리던 경로 였구나 깨달은 뒤 잠근 후 잠잠해 졌다.
근데 그 놈이 다른 값비싼 물품들은 두고 아이와 워크맨의 리모컨과 푼돈을 가져간 이유는 뭐람?
진정한 좀 도둑이 아니었나 싶은게 쉽게 알아 차리지 못한 것들을 야금야금 가져갈 계획을 세웠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다 집 안 모든 재물을 가져갈 거창한 계획을 세웠겠지만 아쉽게 도중에 알아 버렸으니까 넌 그걸로 만족해라.
여기가 지대가 좀 높은데 그 높은 지형의 시작이라 힘들지 않으면서도 전망은 꽤 좋아 큰 도로까지도 관망할 수 있는 위치 였고, 동네도 나름 정들어 다른 지역에 비해 오래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거기서 조금만 걸어 오면 도심으로 들어와 처음 살았던 동네가 나오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중학교 2학년부터 몇 개월 살았던 집이다.
1층은 몇 가지 술을 팔던 자그마한 술집과 기억이 어렴풋한 상점이 있었고, 2층이 세대인데 여기 좀 도둑 장난 아니었다.
워찌나 많던지 밤만 되면 유리 앵글로 된 현관의 열쇠 구멍을 긁어 대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소리도 기억에 생생하구먼.
얼마나 긁어 댔으면 나중에 열쇠가 잘 먹히지 않았을 정도.
유리 앵글 현관을 열면 지금의 부엌 겸 계수대가 있고, 거길 지나면 큰방이 연결 되는데 어느 겨울 쯤 도둑이 유리 현관을 열고 부엌을 지나 방과 연결된 나무 문을 열기 위해 또 키박스를 긁어 댔다.
문은 이미 열렸지만 내부에서 걸림쇠 같은게 있어 그건 부수지 않는 한 절대 열리지 않는데 그것도 모르고 주구장창 키박스를 긁어 대던 도둑이 너무나 무서워 가족들이 뜬눈으로 모여 있었고 결국 가족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모성으로 인해 도둑은 물러 갔다.
이후에도 도둑은 집을 찾아 오긴 했지만 그 날 이후 뜸했다.
당시 동네에 종종 가던 목욕탕이 2개가 있었는데 리뉴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이 좋기로 소문 났던 여긴 여전히 운영 중인 것 같았다.
조금 비싸긴 해도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고 시설이 좋아 대부분 여길 이용 했더랬는데 중학생이 자주 목욕탕을 가기엔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좀 저렴한 목욕탕도 갔었다.
여긴 그 '아주 조금 저렴한' 목욕탕인데 집에서 좀 걸어가야 되는 거리임에도 그 아주 조금을 아끼기 위해 갔고, 그렇다고 시설이 나쁘지 않았다.
리뉴얼한지 조금 더 오래되었다는 차이지만 큰 차이 정도는 아니었고, 혼자서 목욕탕을 가던 시절이라 같이 목욕을 하던 어른께 등을 밀어 달라고 했던 추억이 있기도 했다.
목욕탕을 지나 뿌듯한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오르막길이 평탄해지고, 한 쪽에 당시 여자 중학교가 있다.
이 학교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인도에서 학교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인도와 학교를 가르는 담장은 나지막한 철조망이 전부였다.
도로가 다른 지역에 비해 고도가 좀 있어 학교가 발치에 보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지대보다 높았다.
1989년 건립된 수성도서관은 사실 처음엔 효목도서관이었다.
독서실을 제외하곤 변변한 시설이 없던 당시, 단짝 친구들과 함께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긴 줄에 합류하여 개장과 함께 봇물 터지듯 우르르 몰려가 좋은 자리를 잡곤 공부와 놀이를 즐겼다.
당시 친구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은 대부분 독서실이었지만 가끔 금전적인 부담이 있거나 폐쇄된 독서실 분위기가 갑갑하게 느껴질 경우 개방적인 분위기에 전체적으로 조명이 밝은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
건물 외관의 붉은 벽돌은 당시 '괜찮은 집'이 선호 하던 익스테리어라 상징성 깊은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고, 지금은 대형화된 건물들이 많아 소박하게 보일지라도 당시엔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지은 건물이었다.
세월 앞에 건물도 장사 없구먼.
1층 내부에 좌측 신문열람 코너가 있고 규모에 맞게 널찍한데 미래지향적이 었다고 느낀게 층간 이동 시 메인 통로는 계단이 아니라 무장애길로 일반인들도 다니기 수월했다.
지하는 식당이고 2층부터 열람 및 공부방으로 여성과 남성이 층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내부엔 셔터음을 가리고 몰래 찰깍!
당시에 비해 디바이더가 좀 높아진 거 같은데?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 개관 당시 대구직할시립 효목도서관이었다.
큰 돌에 음각으로 새긴 석판이라 아마 이 건물보다 더 수명이 길지 않을까?
다만 도서관 개명이 있다면 텍스트가 통째 깎여 다시 음각으로 새겼듯 또 한 번의 깎이는 고초를 겪게 되겠지?
건물에 비해 외부 조경은 기억에 비해 변화가 있다.
그저 넓은 잔디밭이었다면 지금은 산책이나 자전거 길과 관련 시설도 늘었고, 어르신 관련 시설도 추가 되었다.
규모도 상당히 넓어진 거 같은데 기억들이 파편화 되면서 확실하게 끄집어낼 추억도 한계가 있다.
나름 그 시절을 회상하며 꼼꼼히 둘러본 뒤 아직은 더 들러야 될 곳들이 많아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한길을 건너면 동구시장과 효목동인데 그 방향으로 걷던 중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가로수가 보였다.
이 정도라면 내가 학창시절에 쫓아다니며 일어났을 먼지 정도는 나이테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오래된 가로수 였다.
가던 중 무의식적으로 한참을 걷느라 사진이 거의 없고, 다만 효목동 철길 아래 토끼굴을 지나기 전 효목삼거리(?) 쯤 음악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카세트 테이프와 LP레코드가 빼곡한 오래된 레코드 가게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가게로 들어가 가게 사장님과 이런 저런 대화와 몇 컷 사진 촬영 허가를 받았는데 그건 다음에 올리기로~
효목삼거리에서 효목동 토끼굴로 계속 진행하다 몇 년 전 동창 한 명이 개원 했던 한의원 자리는 다른 상호가 버티고 있었다.
지금의 정신 머리라면 연락을 했겠지만 이 때 너무 깊은 추억 몰이에 빠졌는지 그럴 겨를 없이 원래 생각했던 동선을 따라 착실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걷기에 여념 없었다.
그리하야 걷는 속도를 잠시 늦춘 곳은 효목시장 입간판이 있는 곳이다.
당시 수성구에서만 살다가 잠시 여기로 이사 온 적이 있는데 중1학년 당시 그저 학우 정도로만 지내던 친구가 꽤나 거리가 먼 이 동네에서 등하교 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중2때 그 친구와 친해질 수 밖에 없을 만큼 집이 가까웠다.
입간판 바로 옆 철길이 보이는 곳에 당시 꽤나 부유하던 그 친구는 유치원과 같은 양옥집 건물에 너른 2층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하셨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당시엔 부모님 신상에 대해 모든 어른들이 꽤나 따지셨다, 부유함이나 가난함이 아니라 집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예의 바름을 강조하던 사회적인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힌 시대- 홀어머니 밑에서도 밝고 예의 바른 내 모습에 동정과 당당함을 읽으셨나 보다.
잠시 그 친구 집터 부근을 둘러 보다 다시 가던 길을 재촉, 인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시장통으로 들어서자 차선만 없다 뿐이지 제법 널찍한 길을 지나 예전 내가 살던 동네로 접근했다.
가던 중 어릴 적 그대로의 효목시장 텍스트가 눈에 보였는데 건물은 그대로지만 텍스트가 아직도 유지된 비결이 궁금했다.
30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건물이나 페인트칠은 좀 낡은데 비해 세월 만큼의 변색은 없었다.
불가사의다!
여기 부근이 우리가 살던 집이 었는데 가물가물하다.
당시 2층 신축 건물로 좀 도둑이 많던 만촌동 집에 잠시 살았던 이유가 바로 효목동 집 건축으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략 이 동네를 서성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동구청 건너편 당시 계방대학교-현재의 산업대- 후문 자리 부근을 거쳐 동구청에서 잠시 갈증을 해소한 후 숙소로 돌아갔다.
학교에서 꽤 먼 길을 등하교 하며 같은 학교, 같은 동네 단짝으로 지내던 그 친구는 아직도 잘 살고 있을까?
2009년 겨울 쯤 논현사거리 부근에서 살던 그 친구를 아주 모처럼이자 마지막으로 본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법대를 나와 어릴 적부터 음악에 심취했던 그 친구와 더불어 지금까지 산책을 하며 만나고 헤어졌던 수 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은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지, 만약 무소식이 희소식인 양 나처럼 이 땅 어느 곳에서라도 무던히 잘 살며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내 추억의 빛나게 해 준 감사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안녕을 빌 지어다.
세상이 변할 지언정 추억은 생동감 있다는 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이라면 난 앞으로도 여전히 그 희열을 누리며 살아 갈 거며 그 희열을 같이 꾸며준 모든 분들에게 여전히 감사하며 살아갈련다.
하루 10여 km 이상을 걸었음에도 전혀 다리가 아프거나 지치지 않았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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