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여전히 겨울이다.
기습적으로 찾아 오는 매서운 추위와 퍼붓는 눈은 영락 없이 '아직 겨울이거덩!' 항변하듯 풀어 놓은 긴장의 허술한 빈틈 사이로 매섭게 파고 든다.
퍼붓는 눈이야 그래도 이내 녹아 버리니까 이쁘게 봐줄만 한데 추위는 말 그대로 복병한테 허를 찔리는 기분이 든다.
사실 그리 추운 날은 아니었음에도 이미 추위에 대한 긴장의 끈을 한풀 늦춰 놓은 탓에 스쳐지나는 추위도 매섭게 느껴지두마 결국 큼지막한 눈송이를 펑펑 떨구어내는 눈 내리는 휴일, 추위를 이겨볼 심산으로 카메라와 음악을 들려줄 스피커를 챙겨 눈구경 산책을 떠났다.
눈 송이 자체도 들쑥날쑥인데 큰 건 목화솜 통채로 뿌리는 정도?
다행히 날이 포근한 편이라 내리는 눈으로 생긴 눈꽃들이 먹는 빙수-여전히 먹는 이야기에 몰입-처럼 사각거리듯 녹아 버리고 그 위에 눈은 쉴 새 없이 내린다.
한 동안 걷다가 여기서 부터 간헐적으로 폰카질 요이땅!이다.
이 길의 끝 너머에 반석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자전거 타고 가는 저 학생은 기인열전에 나가도 되겠어.
이 미끄러운 길을 자전거 타고, 것두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우산을 쓰며 잘 가더라.
송이 송이, 눈꽃 송이, 하얀 꽃송이~
겨울에 깊은 동면에 빠지는 여느 꽃들과 달리 눈을 먹으며 자라는 눈꽃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무럭무럭 꽃망울을 키우고 계신다.
다만 꽃송이 안에 포근한 날씨로 인하여 눈 녹은 수분을 가득 품곤 이 눈이 그치면 금새 꽃망울을 떨어 뜨릴 기세.
내가 좋아하는 눈꽃은 이런 거시여.
하늘에서 굵직한 눈송이를 하염 없이 뿌려댄다.
여기에서 갑자기 변심이 생겨 반석산이 아닌 오산천 산책로로 예정 행로 급 변경했다.
산은 어차피 눈이 천천히 녹을 테고 더 빨리 사그라드는 평지와 오산천 인근의 설경이 궁금했거든.
드뎌 오산천에 도착, 개발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쳐 놓은 공터에 아무렇게나 자란 흔적이 있는 온갖 식물들 위를 뽀얗게 눈으로 덮어 놓았다.
한송이 눈꽃에 감동을 받았다면 여긴 완전 다발이고 밭이다.
여전히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꽃은 무럭무럭 꽃송이를 키워 풍성한 볼거리를 한창 부풀리는 중이다.
눈이 내린 뒤 눈구경 나온 사람들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마치 나를 따라 오면 더 많은 진면목을 보여 주겠다고 새겨 놓은 것 같다.
우측은 자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펜스를 쳐 놓은 오산천이고 좌측은 바로 반석산 자락이라 산과 강의 경계를 따라 절묘하게 그어 놓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세상은 기묘한 세상으로 가는 출입구 같다.
오산천의 퇴적물에서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는 각종 식물들의 세상에도 같은 눈이 내려 추위에 떨지 마라고 뽀얗게 덮고 있다.
철새나 텃새들이 자주 놀러 온다지.
반석산에서 발원한 실개울이 오산천과 가까운 곳에서 유일한 폭포를 만든 곳이 바로 저 다리 밑이다.
부근을 지나게 되면 잘 계시나 문안 안부를 물어 보는 곳이라 이 날도 어김 없이 눈도장 찍어야제.
쏟아지는 눈에도 실개울과 폭포는 굴복하지 않고 늘 흐르고 떨어진다.
한파가 아닌 날에 내리는 눈이라 조만간 이 눈들도 녹아 저 실개울을 이해하고 합류하겠지?
다른 각도로 한 컷 더~
내려가서 물을 만져 보고 싶지만 한 순간의 충동으로 괴롭힐 수 없는 노릇잉께 보는 걸로 만족하자.
다리 위에 올라 아래를 바라 보면 이런 재미난 사진이 보인다.
반석산 둘레길이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는 와중에 여기가 어찌 보면 가장 낮은 곳이기도 하다.
위에서 보니까 실개울의 수량이 많구먼.
여기서 부턴 오산천 산책로를 버리고 반석산 둘레길로 들어섰다.
이쯤이면 언덕배기에 내린 눈이 어떻게 바꿔 놓았을지 궁금하잖아.
다리를 지나 거듭되는 오르막으로 오르며 지나온 길을 바라 보면 그래도 눈이 온 이후로 나 혼자만 이 길을 지난건 아니다.
나처럼 세상이 어떻게 바꼈고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왔던 방향과 같은 둘레길로 들어서 거듭된 오르막길로 힘겹게 올라 길이 평탄해질 무렵이면 이렇게 오산천 전망데크가 있다.
잠시 앉아 커피 한 모금으로 가쁜 숨을 달래고 주위를 둘러 보며 망원렌즈로 몇 장의 사진을 담았다.
전망데크 바로 아래에 산책로가 지나가는데 좀전에 이 길을 지나 왔으니까 내 발자국도 어딘가에 찍혀 있겠지.
시야가 탁 트인 정면은 이렇게 신도시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수도 없이 봐 왔던 이 자리가 날이 거듭될수록 과거의 모습을 지우려고 변신하는 중이다.
조금 쉬다가 내가 걸어가야 될 둘레길로 이 길의 종착은 노인공원이다.
역시나 심심하게 보일만한 겨울 나무가지들에 눈이 덮혀 멋진 자태를 뽐내며 아직 우린 살아 있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세찬 바람이 눈발을 실어 나른 증거가 포착되었다.
온통 눈밭으로 대풍년일세.
노인공원이 가까워져 노작마을 뒷편 산자락은 그야말로 눈의 정원으로 화사하게 꾸며 놓았다.
걸어 오면서 지나친 한 사람은 거의 고봉의 설산을 등산하는 차림이었는데 나처럼 콘크리트 눈밭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 온 사람 같았다.
이 둘레길을 지나면서도 그 풍경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세히 구경하며 지나자니 자연 걷는 걸음이 더딜 수 밖에.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지만 이 산책을 출발할 때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져 눈송이를 듬성듬성 뿌릴 뿐더러 눈송이 자체도 많이 축소되었다.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거닌다는 것은 마치 작년 태백에서의 기분처럼 평화로움 조차 성이 차질 않아 더 조바심 내는 최선의 연출과도 같았다.(한강의 세상 만나기, 검룡소_20151128, 눈꽃들만의 세상, 함백산_20151128)
내리는 눈이 뺨에 닿아도 전혀 차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으며 도리어 풍성한 다운 패딩이 추위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온 몸을 옥죄는 느낌이 더 솔직한 기분이다.
둘레길에 간헐적으로 찍힌 발자국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노인공원에 다다랐을 때엔 그 흔적조차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고 그 하얀 백지를 깔아 놓은 텅빈 공원은 온갖 희귀종의 눈꽃과 나무들이 자신들만의 숲을 구축하곤 누군가 봐 주길 애달픈 곡조로 유혹한다.
여전히 허공을 가르는 눈발.
눈 세상을 감상하다 보니 시간은 제법 흘렀다.
시선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잠시 세상을 바라보는 그 하얀 시선과 마주치면 마법에 걸린 사람 마냥 대충 훑어 볼 수 없었고 그 마법의 각성으로 흐르는 시간 조차 유혹의 굴레에 칭칭 감겨 버려 잠깐이라고 여겼던 시간이 한 자리에서 머문 것 치곤 멀리 도망가 버렸으니 몽환의 유혹이 꽤 강력했었나 보다.
2월의 마지막 날이자 휴일인 그 아쉬움은 풍족하지 않았던 여유로 인해 어쩌면 달콤한 여운이 더 강해 허투루한 일상이 범상치 않은 추억의 꾸러미를 짊어 지고픈 집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절이, 이 계절이 지나고 나면 난 잠시 잊어버릴 지언정 완연히 지우지는 않을 테고 그 만큼 다시 만날 다음의 시절과 계절이 더 반가울 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반가움과 기다림을 정리하며 올 2월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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