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내린 비와 아직 남은 구름이 묘한 가을 정취를 연출했고, 그로 인해 가을은 한층 익어 그립던 제 빛깔을 되찾아 세상을 활보했다.
반석산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향하며 매년 가을마다 습관처럼 육교에 서서 길을 따라 번지는 가을에 중독되어 버렸다.
이 나무의 이름도 모른 채 십여 년 이상 가을마다 나무 사잇길로 지나다녔다.
대왕참나무?
이 나무들도 가을이 깊어질 때면 붉게 물들며 지나는 사람들을 반기겠지?
반석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초입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냥이 녀석이 쳐다보고 있었다.
집사라고 꽁꽁 숨어 있는 녀석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한동안 쳐다보던 녀석이 내가 아는 척을 하자 두 발짝 멀어졌다.
녀석에게 있어 내가 공포의 대상이라 얼른 자리를 벗어나 언제나처럼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 1시간가량 걸었고, 마지막엔 또한 습관처럼 황톳길로 내려가 걷다 세족을 한 뒤 가까운 벤치에 앉아 가을 내음을 흠뻑 마셨다.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가을을 가장 편하게, 멋지게 누리는 방법은 이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늘 같은 자리에 서서 고단함을 초월하여 같은 공간을 지나는 계절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르게 물들어 가는 단풍도 가을의 화려한 꽃과 같은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붉다는 문어적 표현은 한 가지지만 그들의 붉은 변화는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한 헤아릴 수 없는 다름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폭염 속에서 피어 이제는 가을의 여러 화려한 존재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배롱꽃이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을이 안내하는 길을 밟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저분하다고 여겼던 퇴색이 거리를 두고, 여러 퇴색이 모여 내면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여 가까워질 때 모든 존재들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성숙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 그래서 새로운 탄생 못지않게 성숙하고 무르익는 것들에게도 진면목을 보기 위해선 인내라는 안경이 필요했다.
오산리 석불 입상 방면에도 늘 가을을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몇 그루 나무가 잔디광장 한 켠에 모여 봄을 찬양하고, 가을을 꽃피웠다.
홀로 서서 여름이면 무던히도 사람들을 반기던 배롱나무는 일찍 가을 옷을 입곤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근래 공원이나 길에 속속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화살나무 또한 이제는 가을이면 빼놓을 수 없는 매력 덩어리라 복합문화센터 뒤편으로 걸어가면 길게 줄지어 늘어서서 마라토너를 응원하는 관중처럼 붉은 이파리를 흔들어 반겼다.
먼저 붉은 깃발을 흔든 녀석은 일찍 겨울 잠에 빠져들고, 뒤늦게 붉은 깃발을 흔든 녀석은 잠든 녀석들까지 응원하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나무에 늘어져 있던 거미줄이 떨어지는 낙엽을 붙잡아 숨길 수 없는 가을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던지 탐스런 빛깔의 뺨을 부풀렸다.
다시 돌아가는 길, 갈 때 흔들었던 가을 깃발은 어느새 수줍음을 떨구고 바람살에 가을 춤으로 대신했다.
늘 고마운 가을은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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