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 5

한적한 길과 옥계서원_20210513

한적한 정취에 더 나아가 연이은 봄빛 그득한 나무터널을 맞이하며 이다지도 걷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막연히 마주치는 나무의 이야기들, 길 위에 시간을 들으며 터널 속으로 걷다 보면 계절의 향취가 더해진 발걸음은 어느새 사뿐히 리듬을 타며 걷게 된다. 지난 만추에 지나던 구례 섬진강변길처럼 마냥 차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불과 보름 전 쯤 황매산의 분홍 나래를 보고 무슨 미련에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여전히 마주치는 차량과 인가가 거의 없는 길 따라 엑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빼서 물 흐르듯 천천히 달린다. 불과 보름 전 사진을 찍었던 곳은 예상대로 신록은 짙어지고 터널은 더욱 견고해졌다. 시간이 뒤섞여 있지만 나름 공통분모를 찾으라면 봄의 화두가 일치한다. 싱그러운 초..

빛의 언어, 함벽루_20210103

잠깐 주어진 시간에 텅 빈 공원 거리를 산책하며 뺨을 찌르는 겨울 강바람과 잠시 시간을 보낸다. 속삭이는 귓속말처럼 강 너머 공원 불빛은 각양각색의 은은한 스펙트럼을 연주하며 청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향기를 발한다. 10여 분간 누각에 서서 처음 밟아본 땅의 무지개빛 소리와 코끝 알싸한 바람의 향기, 잠시지만 새로운 공간의 흥겨움에 잠시 냉철한 현실을 잊는다. 잠시도 소홀하지 않고 약속한 때가 되어 불빛이 바뀐다. 강에 기댄 그 컬러가 아른거리며 혀 끝의 달콤한 캔디 같다. 도심가를 등지고 있어 멋진 도시 야경은 기대할 수 없지만 텅 빈 세상에 홀로 선 기분을 선물해 준다. 강가 전망을 적나라게 알려주는 누각으로 빛과 강의 질감이 눈으로 전해진다. 불 꺼진 작은 절을 지나 강변길과 산책로를 걷는다. 계속..

낭만의 태동, 의동마을 은행나무길_20200616

가을이면 소위 말하는 낭만을 찾아 전국은 역동한다. 은행나무 심연의 나뭇결과 함께 완연한 노란빛이 더해져 특유의 성숙함이 극에 달할 때 외면은 관심으로 거듭나고, 그 나무 아래서 낭만은 빅뱅 하게 된다. 칼을 뽑은 김에 무를 싹뚝해 버린다고, 거창을 찾은 김에 온천하고 적막 속에서 조금씩 태동 중인 낭만을 미리 맛본다. 물론 가을에 비할 바 못되지만 길을 가득 채운 인파보다 차라리 황량함이 낫다. 외면과 관심은 손바닥 뒤집기 같다. 나름 녹음 짙은 이 길도 운치 있구먼. 영글어 가는 사과. 나른한 오후의 나른한 풍경.

합천호에 떠다니는 나무_20191127

오도산 휴양림과 작별을 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합천을 떠나 거창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호수 위를 떠다니는 나무에 반하던 순간이었다.사막 마냥 황량한 거대 호수에 오아시스처럼 작은 재미를 주는 나무는 사실 떠다니는 게 아니라 작은 섬에 의지해 수면 위로 불쑥 솟아 가만히 서 있고 호수를 스치는 바람에 이끌려 호수의 작은 물결이 흐르자 마치 나무가 호수를 표류하는 것만 같은 착시 효과 였다. 다음 여정의 목적지인 남원으로 출발하여 거창 대야를 지나던 중 호수 위로 솟은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편평한 수면 위에 가을 옷을 껴입은 나무라 그 모습이 도드라졌기 때문인데 적당히 차를 세워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길가에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 서행 하며 가던 중 깔끔하게 정돈된 대야 마을에 닿자 너른 갓길이 ..

오도산 정상에서 천리안의 시선으로_20191126

독수리의 천리안이 되어 넓은 세상을 한아름 품어 시선의 경계점에 대한 동경의 나래를 펼친 날이다.시선이 닿는 곳은 금수강산이 새겨 놓은 장관이, 햇살이 닿는 곳은 구름이 새겨 놓은 뜻깊은 상형 문자의 아름다운 싯구가 넘치는 세상이었다.계절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충실하고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간과하지 않게 훈계해 주는 자연의 가르침을 이고지며 하늘과 가까운 꼭지점에 서서 아무런 말 없이 겸허해 졌다. 평소 기나긴 동선을 따른 것과 달리 이번 여정은 잦은 이동을 배제한 만큼 합천에 있는 동안 오도산 정상만 목적지로 삼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을 따라 결국 산봉우리에 다다랐다.도착과 동시에 뒤따른 오토바이 한 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평일의 한적함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는데 산 정상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