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89

아쉬운 불발, 영월관광센터와 청령포_20231120

단종의 슬픔으로 점철된 청령포는 무거운 초겨울 공기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육지 속의 섬이 아닌 땅의 기운이 근육처럼 불거진 그 배후의 지세가 특이한 명승지였다.월요일 아침부터 청령포를 오가는 배는 분주하게 강을 횡단하며 뜀박질하는데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이 작은 세상엔 눈을 뗄 수 없는 것들이 곳곳에 은폐 중이다.모노톤의 딱딱한 벽엔 인간에게 친숙한 생명들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크게 굽이치는 서강의 온화한 물결엔 바다로 향한 서슬 퍼런 집념이 웅크리고 있었다.조선 초기엔 한이 서린 유형지로, 현재는 한강이 되기 전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지리적 부표, 청령포에서 작은 울림의 노래를 들으며 다음 만날 곳으로 떠났다.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

상행_20201120

곧장 창녕을 떠나 대구에서 지인을 만나 모처럼 막창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 점심은 대구에 오면 한 번 정도는 꼭 들르는 뼈해장국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상행 고속도로를 탔다. 근데 여긴 찾는 시간대에 따라 맛이 들쑥날쑥인데 잘만 걸리면 구수한 진국이 나온다. 속리산 휴게소에 들러 멋진 구병산 산세는 꼭 감상해야지. 휴게소 바로 옆 시루봉도 특이하지만 멋진 몸매를 갖고 있다. 휴게소 뒤뜰에 어린 냥이들이 굶주림에 힘겨워했다. 집사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늘 가져 다니는 햇반 그릇에 녀석들 한 끼 밥을 채워주자 허겁지겁 해치웠다. 뻔히 알면서 지나친 찝찝함보다 녀석들의 삶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우포 출렁다리와 쪽지벌_20201119

우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출렁다리는 생태촌 창녕 공무원을 통해 추천받은 우포 일주 탐방로 중 꼭 들르길 추천하던 장소로 바로 앞까지 차량 출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멀찌감치 차를 두고 뚝방길을 따라 찾아갔는데 우포 하류 위치에 산밖벌이라는 근래 복원한 늪과 쪽지벌 사이를 가르는 토평천 도보길로 스릴감이나 절경보다 원시 하천 위를 걸으며, 산업화 시기에 거리를 누비던 버드나무의 희미한 기억을 반추할 수 있다. 갈대가 무성한 산밖벌을 돌아 출렁다리를 건너 뚝방길을 따라가면 쪽지벌로 향하게 되는데 우포에 발을 딛고 가장 아름다웠던 건 들판 민들레처럼 혀에 살짝 감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하나씩 재현되고 있다는 것, 그냥 아무렇게나 두어도 자연은 스스로 각성하고 틀을 잡아가는 자생 기능이 발현되고 있..

원시 호수의 형태, 우포_20201119

우포는 크게 우포, 사지포, 목포, 쪽지벌이 있는데 우선 우포 먼저. 사는 인근에도 큰 저수지가 몇 개 있긴 하나 우포는 4개의 호수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늪지대이자 자연 생태지역이나 진배없었다. 산과 달리 주변을 돌며 산책하기 좋은 평탄한 길인데다 수도권과 달리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인가도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전체를 본다면 마치 테마별 분류한 것처럼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다. 4개의 호수 중 가장 큰 우포늪을 먼저 밟으며 걷기 좋은 대대제방으로 향했다. 이미 떠난 가을의 흔적만 남아 퍼붓는 비와 세찬 바람이 더해 을씨년스러웠다. 이따금 우두커니 서 있는 버드나무의 노랑이 바람결에 펄럭이며 바람을 뒤따르려 하지만 매몰찬 바람은 멀찍이 남겨 두고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져 버렸고, 호수 한 켠에 빼곡히 ..

구수레? 수구레! 창녕 이방식당_20201119

창녕 우포 여행에서 식후경을 지키기 위해 들렀던, 나름 이 지역에서 유명한 국밥집이란다. 수구레? 국밥이라는데 동네 하나로마트에 들르게 되면 꼭 소고기 한 팩이나 하다못해 국거리사태나 양지라도 사면서 내가 흔히 알고 있는 기름덩어리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간 질긴 듯 쫄깃한 식감에 비계 비슷한 느끼함도 살짝 가미되어 있지만 확실히 기름덩어리는 아닌 맛이다. 선지가 들어가 있어 그리 나쁘지 않은데? 국물이 살짝 밸런스가 맞지 않아 좋은 재료들이 각기 화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특유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 식감을 폄하하긴 아깝긴 하다. 다행인 건 코로나 잠잠할 때, 때마침 내리는 비로 손님이 없어 수월하게 배를 채웠다. 수구레와 선지가 들어간 소고기 국밥인데 사실 내가 선호하는 소고기 국밥은 아니었..

멋진 숙박 시설, 우포생태촌_20201118

겨울 낮이 짧긴 해서 가뜩이나 밤이 일찍 젖어드는 시골은 더더욱 암흑 천지가 되어 이른 저녁임에도 한밤 같다. 특히나 우포생태촌을 이용하는 건 우리 뿐이라 일찌감치 진공 상태 마냥 바람에 실려 이따금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시골초가를 표본으로 만든 우포생태촌은 창녕군에서 직접 운영하는 숙박시설로 흔히 애용하는 휴양림 내 휴양관이나 통나무집 개념과 흡사하다. 차이라면 한길과 멀찍이 떨어진 휴양림과 달리 여긴 우포늪 일대와 더불어 인접한 인공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생태촌 바로 뒤편이 마을과 연결된 유일한 도로라 지나가는 차소리는 매우 가깝게 들렸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자면 접근성은 킹왕짱이다. 잠자리나라와 생태체험장과 함께 조성된 만큼 얼른 짐을 풀고 우의만 걸친 채 암흑 같은 생태체험장에 접어들었는데 ..

산과 강의 어울림 속에서, 하동 고소성_20201118

섬진강 남쪽 구례에서 광양으로 가는 강변길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데다 봄이면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길게 늘어서 드라이브 하기 좋은 도로로 그 길을 따라 화개로 진행했다. 화개장터 일대는 장날이 아니라 인파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휑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말과 노래로만 접하던 화개는 화개천을 중심으로 양갈래 높은 산과 더불어 상류 방면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지리산, 섬진강 너머 구례 또한 높은 산이 버티고 있어 너른 동네는 아니지만 밀도 있게 짜여져 있다. 다음 목적지 고소성으로 가던 중 잠시 들러 한참을 달려온 여독을 깊은 한숨으로 밀어내고 다시 가던 길을 바란다. 화개로 가던 중 '전망 좋은 곳'이란 푯말을 따라 잠시 들른 곳은 섬진강변 작은 휴게소로 전망 데크가 있었다. 남도대교로를 따라 운..

가을 서사시, 담양_20201118

햇살이 어디론가 숨어 버렸지만 대기의 화사함은 오롯이 숨 쉬고 있는 만추의 전형적인 날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거닌다. 이따금 갈 길 바쁜 바람결에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지만 그 또한 희열에 대한 남은 미련처럼 길 위를 거닌 감촉은 아득한 추억처럼 폭신하고 간드러진다. 계절보다 더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낙엽 자욱한 만추는 그래서 기억에 더 선명한 각인을 새겨 넣는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오고 가는 차들도 이 길을 지날 즈음이면 가던 조급함을 잊게 되고, 앞만 보던 시야의 긴장을 늦추며 일 년 중 찰나의 이 순간을 위해 굳게 닫힌 마음의 창을 열게 된다. 뽀얀 눈이나 오색찬연한 꽃잎이 아님에도 아름다움을 마주칠 때 터져 나오는 감탄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도보길이 아닌 일반 도로라 지나는 차량이 위험한데..

베이스캠프는 담양_20201117

담양을 가면 꼭 들리는 국숫집은 집에서 만사가 귀찮을 때 육수에 사리만 넣어 먹는 초간편 방식이면서 가격은 저렴하다. 영산강변에 많은 국숫집이 즐비하지만 습관처럼 찾는 집, 시골 저녁은 일찍 찾아와 18시 정도에 찾았음에도 손님은 거의 없었고, 코로나 이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거리를 두는 덕분에 몇 안 되는 손님들도 널찍이 거리를 두고 앉아 거기에 동참했다. 오후 들어 지루한 비가 내려 야외 테이블은 앉을 수 없었으나 때마침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다. 이 국숫집에 들리면 요리는 국수와 삶은 계란 뿐, 허나 계란은 꼭 먹어야 된다. 다 같은 계란이겠거니 하지만 여기 계란은 정말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다. 마지막에 서로 웃으면서 대하자는 건 정말 공감. 늦은 밤이 아닌데도 담양은 벌써 한밤 중, 창 너머 ..

가을 여운조차 아름다운 강천산_20201117

가을이 되어 단풍이 익으면 꼭 찾으리라 다짐했던 강천산은 3대 단풍산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나무도 많지만 이파리 또한 아리따운 선홍색으로 유명세가 한창이다. 더불어 걷기에도 좋고, 주변을 장벽처럼 두른 산들이 있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계절의 매력과 일대의 멋진 풍경들을 감상하기 좋다. 계곡길의 지나친 가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많지만 월정사 전나무길이나 내소사 전나무길처럼 시간이 지나면 걷기 좋은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이미 절정의 단풍을 훌쩍 지나 대부분 낙엽으로 뒹굴고 있는 늦은 시기지만 여전히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미리 예정한 대로 광덕산을 거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한다. 최고의 시기에 오면 좋지만 늦었다고 해서 모든 기회를 잃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인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