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에 정선 하늘길 트래킹(사북의 잃어버린 탄광마을_20141129)을 다녀온 후 몰아 닥친 한파는 마치 내 여행길을 자연의 배려로 착각했고, 올해도 비슷한 시기인 11월 마지막 주말을 이용해 여행 계획을 잡으며 의례히 축복을 자만했건만 이번엔 그런 자만을 비웃듯 여행을 터나기 하루 전에 한파가 복병이 될 줄이야.
그렇더라도 내 꿋꿋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벱이라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설레는 마음을 그대로 실은채 신고한터미널로 3시간 반 동안 날아갔다.
동서울에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리즈로 꿈 꾼걸 보면 한 주 동안의 피로 회복엔 더할나위 없는 명약 처방이었다.
이번 숙소는 고한과 사북의 길목에 자리잡은 메이힐즈 리조트.
원래 하이캐슬을 선호한데다 원래 여행의 코스가 하이캐슬 너머에 있는 하늘길이라 다른 콘도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예약 시점에 일찌감치 예약 종료된걸 보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넋 놓고 고민만 하고 있다가 이참에 새로운 루트(?)도 개척해 보자는 결심이 굳자 이연걸보다 더 날렵한 손가락 놀림으로 신속히 예약해 버렸으니 겪어 보고 운신의 폭을 넓히는 기회도 나쁘진 않다.
결과는 하이캐슬이나 메이힐즈나 장단점은 있고 인척에 있는 두 쌍벽인데다 산 언저리에 있는 하이캐슬에 비해 메이힐즈는 길목에 있는 특성상 사통팔달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다.
그걸 믿다가 그 동네 좀 돌면서 헤메긴 했지만 그 덕에 다음에 가더라도 능수능란하게 길을 찾을 수 있겠다.
이튿날, 28일 아침에 일행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나의 이른 기상을 의아해 했지만 전날 버스 타고 오는 길에 퍼질러 잔 사실까지 이실직고할 필요는 없고 능청스럽게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않냐며 넘겼다.
날 밝아 베란다에 나와서 보니 산과 메이힐즈 사이에 이렇게 단촐한 태백선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철도라 밤새 기차 지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내려다 보는 기분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징표 같아 혼자서 심쿵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보는 기차와 철길은 여전히 내가 동경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우쳐 줬다.
숙소를 빠져 나와 얼씨구나 하면서 원래 목적지인 화절령 하늘길로 향했지만 아뿔싸! 사북 하이원길에서 빠지는 보성사 방면 화절령길의 경사진 초입이 완죤 꽁꽁 얼어 때마침 내려오는 차량이 스키점프할 기세로 내려오길래 이렇게 포장된 길도 올라가는 것조차 힘든데 보성사를 지나 비포장과 급경사길에선 차량이 트위스트 출 것만 같아 포기하고 다른 방편을 찾자 싶었다.
예상치도 못한 좌절이라 방편도 없고 차선책도 속수무책이라 길에서 시간 때우기 아까워 얼릉 검룡소로 향했다.
검룡소에 도착했을땐 꽤나 한 성깔하는 매서운 바람에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서 괜히 왔나 싶을 만큼 날이 험상궂었고 더군다나 그 넓직한 주차장엔 우리 차를 포함해 꼴랑 3대 뿐.
그마저도 검룡소를 온 객이 아닌 공무원 차량 같아 오늘은 타이밍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따봉이었다.
나름 중무장을 하고 올라가는데 아직은 초겨울이라 날씨가 그리 매섭지도 않고 눈도 한 많은 이 세상을 원망하며 펑펑 내리지도 않아 오로지 우리 뿐인 세상이라는 착각에 도치되어, 아무런 그림이나 낙서도 없는 하얀 도화지에 내 멋대로의 그림을 그리듯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없는 눈밭의 순수함에 감동 백배되어 룰루랄라 하면서 걸어 올라갔다.
태고의 자연 같이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는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힘찬 강물이 세상 어떤 일에도 끊임 없이 흐르는데 우리라고 초장에 초를 칠 수 있나.
두텁진 않지만 초겨울의 첫 한파라 여기서 맞이하는 눈의 향연이 워찌나 반가운지.
얼마 전까지 달아나는 가을이 그립다 했건만 금새 잊어 버리고 뽀얀 속살을 내민 겨울의 손에 이끌린 모습을 보면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온통 눈에 덮힌 세상의 한켠에 잠자고 있는 그네조차 완전히 눈방석을 깔아 놓았다.
검룡소로 가는 길은 두터운 눈밭이 아닌데도 어디를 보나 고스란히 눈이 쌓여 있어서 어느 하나 훼방을 놓지 않고 자연들이 어울려 다소곳하게 지키며 한강의 발원을 응원하는 곳인가 보다.
이 좁고 위태로운 자리에서 조차 가냘픈 눈이 쌓여 쉬고 있으니까.
마침 목도 마르고 이 모습이 이뻐 냉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는데 설령 먼지가 있었더라도 아주 깨끗한 먼지려니 하고 먹어 버렸다.
그래도 설마 새똥은 없었겠지?
아이스크림이 일렬로 진열되어 맘껏 먹으란다.
발자국이 원래 없었던걸 보면 우리가 첫손님?
지나가다가 아차 싶어 다시 돌아와 사진으로 담아봤다.
검룡소 가던 길에 잠깐 옆으로 빠지는 이 길의 다리 너머엔 야생화 생태숲이란다.
아무런 발자국이 없을때 한 컷 생생하게 담아 주고 첫 발자국을 찍는 이 생뚱 맞은 기분이란...
어릴 적 봤던 동화 중에 온통 빵으로 덮힌 세상 같다.
티라미슈 케익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식욕이 급 작렬.
다리의 바닥은 나무를 깔아 놓았는지 그 틈새엔 눈이 쌓이지 않고 그 밑바닥을 보여 줬다.
다리 밑에 조차 눈이 쌓여 있구먼.
눈이 얌전히 쌓였다가 포근한 오후 햇살을 받아 서서히 녹기 시작하던 그 물방울들이 자리를 옮길 무렵 다시 산골의 매서운 추위로 그 자리에 얼어 붙어 생긴 고드름이 경이롭다.
시간이 멈춘 듯 아주 느리게 움직이던 눈들이 이 작은 고드름에 모여 재잘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만 같거든.
전방에 보이는 곳이 이 길의 끝, 검룡소다.
트래킹이 아닌 차라리 산책에 가까울 만큼 주위 볼거리에 정신이 빼앗겨 너무 싱겁고 수월하게 와 버렸다.
사진은 좀 찍었다만 순백색의 눈이라 노출 문제가 고스란히 사진에 드러나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이 더 많은데 그래도 이 멋진 장관들을 예상치 않게 본 희열은 내 기억에 사진 만큼이나 선명하게 책갈피 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검룡소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세상의 빛을 본 한강이 이런 계단 같은 귀여운 폭포를 만들며 힘차게 첫발을 내 딛는다.
애시당초 필터도 없거니와 삼각대를 놔두고 가서 임시방편으로 얼음이 쌓인 난관에 카메라를 올려 놓아 찍어야 될 상황이라 장노출을 하게 되면 카메라가 스믈스믈 움직여 그나마 가장 긴 장노출이 이 사진 같다.
역시 한강의 첫 나들이라 수량도 많고 맑음도 어느데 비할 바가 못 된다.
이게 바로 한강의 첫 시작, 검룡소다!
지하수의 통로 치곤 꽤 물이 많은데 물이 쏫아 나는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
여기 와서 메뉴얼 포커싱으로 날리는 눈발도 찍으며, 미리 담아온 커피에 카스텔라를 곁들여 먹는 이 기분은 겨울이지만 온 세상이 포근해서 마치 세상의 눈조차 녹아 버릴 착각마저 든다.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이 물줄기는 장장 514킬로를 달려 그 강이 지나는 땅의 사연을 들려주리라.
근데 물속에 심심찮게 발견되는 동전들.
물줄기가 막힐 수 있으니 동전 던지지 마라는 문구가 있음에도 던져진 동전의 주인들은 수많은 생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물론 동전 몇 개로 막히지는 않겠지만 여기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경각심 없이 동전을 던진다면 그 수가 엄청나겠지.
내 동전 하나로는 괜찮지만 내 입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동전을 던진다면 그건 이 검룡소 채우기 시간 문제일 것이다.
자신의 소원을 위해서라면 수천만의 생명조차 관심 없다는 그 이기심에 박수 쳐주리?
허락되는 곳이라면 여지 없이 눈들이 쌓여 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내려갔건만 나는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무수한 발자국만 찍어댔다.
이 정도라면 확실한 발도장을 찍었겠지?
근접 촬영을 한 것들 중에 가장 지대로 나온 사진인데 뒹굴러 흐르던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떨어져 나온 작은 알갱이들이 돌탑을 쌓듯 차곡차곡 쌓여 옆에서 흘러 내리던 물과 만나 얼음이 된 건 아닐까?
두번째 사진은 최대한 장노출 한답시고 감도를 가장 낮추고 조리개는 가장 조여서 겨우 가늠할 수 있는 사진을 얻었다.
필터와 삼각대가 절실한 순간이었는데 굳은 일기로 별 기대 없이 주차된 차에 놔두고 온 후회에 비하면 기특혀 ㅋ
이건 검룡소와 합류하는 다른 물줄기인데 엄밀히 따지면 검룡소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물줄기다.
이 또한 한 동안 잦은 비와 눈에 수량이 풍부한데 이 물줄기를 따라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없어 본 걸로 만족해야겠다.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 물방울이 하나씩 달라 붙어 얼어 버린, 경이로운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가지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얼음이라 날이 더 추워지면 점점 커지다 어느 순간 그 지난한 무게를 견디지 못할 즈음이면 흐르는 물로 떨어지겠지?
의외로 망원렌즈가 이런 세세한 자연의 신비를 담을 수 있는 역할을 해 준다.
야구에서 타자가 홈런을 치면 동료 선수들이 홈에 나와 손을 뻗어 하이파이브를 하는 형상처럼 나무들이 손을 일일이 뻗어 '잘 째려 봤응께 겁나 수고했더라고잉~'그러면서 응원해 주는 길이다.
여름 신록이 무성할때엔 나무 터널이 되었겠지만 겨울이라 앙상한 그 가지가 부끄러워 눈옷을 입고 대기 중이시다.
고사리?
이 허연 눈밭에 살아 있는 녹색이 반가울 줄이야.
까치집이 참 많다고 지나쳤던 것들이 사실 겨우살이였다.
강 건너 비탈진 나무숲의 앙상한 나무 꼭대기에 이런 겨우살이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이던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들이라 이 녀석들도 문명의 이기가 어지간히 질렸나 보다.
최대한 망원으로 당겼는데 우리의 망원 선수가 또 한 번 선방한 날이구먼.
실타래처럼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있어 마치 이 중요한 젖줄을 자연이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 틈으로 꼬여 있고 널부러져 있는 가지들과 그 밑을 늘상 변함 없는 모습으로 흐르는 한강이 보이겠지만 여름엔 신록에 휩싸여 터널로 보이겠다.
단편소설을 정독하듯 검룡소를 한 차례 느긋하게 둘러보고 떠나는 길에 원래의 의도한 행로와 달라 많이 서운했던 감정의 앙금을 조금이 나마 덜어 낼 수 있어서 조금은 홀가분하다.
겨울에 뭐가 있을까?에 대한 의심은 역시 자연이구나 하는 안도로 바꼈고 이런 멋진 자연의 작품을 오지 체험처럼 가슴을 한껏 열고 찬찬히 감상할 수 있었음은 늘 여행을 긍정으로 받아 들이려 했던 내게 복이나 다름 없었다.
검룡소에서 빠져 나와 태백으로 가는 길에 눈구름에 뿌옇게 덮힌 매봉산의 허허로운 경관이 장관으로 보인다.
첫 목적지인 화절령 하늘길의 사방이 트인 능선길을 보려 했지만 불발 되어 검룡소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았지만 여전히 시야가 트여 있는 고지대 산능선의 미련은 애써 떨치려 해도 남아 있는 먼지처럼 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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