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첩첩한 이끼 계곡과 만항재_20161015

사려울 2017. 3. 24. 01:02

늑장과 지나친 여유의 원흉은 바로 '나'요 일행들이 전혀 가 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을 안내 했던 루키도 바로 '나'였다.

당시에 갑자기 생각 난 이끼 계곡은 사실 평소 잊고 지내던 장소 였고 사진을 찍고 싶다기 보단 마치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세계로 기억했던 것 같다.

단양에서 출발하여 시골의 한적한 지방도를 거쳐 쉼 없이 달려 왔던 긴장과 땀을 솔고개에서 훌훌 털어 내고 다시 다짐하듯 상동 방향으로 출발, 설익은 가을이 펼쳐져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산봉우리 고지대에서 부터 가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상동을 앞두고 빼어난 바위산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던게 바로 산봉우리에서 번져 내려오기 시작하는 가을 풍광과 어우러져 턱관절에 적절한 무리가 왔다.

냉큼 차를 세우고 도로가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 댔는데 전형적인 가을 날씨 답게 햇살은 사뭇 따갑다.

산이 첩첩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올 때마다 느끼는 꼭꼭 숨겨진 보배인 양 각양각색의 산과 계곡에 자연 앞으로 진행되는 속도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이 바위산이 아마도 선바위산일 터.



상동삼거리에서 상동으로 접어 들지 않고 우회전해서 태백 방면으로 진행했는데 모자란 시간이 안타깝다.

지난번 들렀던 상동 꼴뚜바위와 동네에서 갈증조차 해소하지 못하고 목적지로 설정했던 이끼 계곡으로 바로 진행해야 됐으니까.

처음엔 잘 알지 못하는 지식에 허풍을 떨어서 꽤나 긴장한 모양이었나 보다.

칠량이계곡 휴양림 초입의 캠핑장과 천평교 삼거리길을 지나 고갯길로 접어 들었었는데 번지수가 맞지 않은 것 같은 뭔가 이상한 기분, 평소 교통량이 거의 없는 도로라 얼른 유턴해서 다시 왔던 길로 천천히 진행하면서 그냥 나의 동물적인 감각에 맡겼다, 감각은 아니고 위성 지도를 보며 걍 찍었던 자리가 바로 이끼 계곡 초입이었다.

이거 초행길이었다면 필시 찾지 못할 정도로 초입은 풀이 무성하게 가려져 꽁꽁 숨겨 놓은 비밀의 장소 같다.

한길에서 무성한 풀숲을 지나 발자국 비스므리한 표식을 따라 조금 들어 가자니 드디어 내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끼 계곡이 한 눈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끼 계곡은 말 그대로 온통 이끼가 돌이며 나무를 도배해 놓은 이끼 세상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끼가 그리 생소하지 않음에도 이렇게 자욱한 이끼는 처음인지라 전혀 다른 종의 이끼와 더불어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그들은 평소엔 서로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다 낯선 이방인이 들어 오면 침묵을 지키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 불청객들을 쫓아 내고 싶어 한다.

이끼가 많은 자연적인 환경 답게 공기 중에 텁텁한 습기와 이슬 내음이 매캐하고 소리라곤 바람이 흔들어 무언가 서로 몸을 부비는 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새소리 뿐이다.

낯선 불청객의 경계를 알아차리고 우리는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며 사진만 찍고 일체 어떤 자연적인 터전에 인위적인 조작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한 사람만 겨우 걸어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오솔길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나무들조차 이끼가 보듬어 안고 지켜주려는 보호 본능을 발휘하고 있어 처음에 들던 익명의 공포는 어느새 포근한 격리로 바뀌어 있었고 몇 장의 사진만 담곤 금새 내려가야 겠다던 조바심은 보폭이 좁아지며 음악을 감상하듯 감각의 몰입으로 잡념을 떨쳐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세세히 동화되어 갔다.





이끼를 매크로 촬영해 보면 여느 이끼랑 별반 다를 바 없다.

차이라면 그냥 무성하게 많다는 것과 중력을 거슬러 배양되는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계곡을 메우는 물소리는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고 수정보다 맑을 것만 같다.

그 흐르는 물조차 만지지 않은 것 보면 엄청나게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했었나 보다.





이런 좁은 길과 길가에 빼곡한 신록은 조급한 마음을 다스려 준다.

빠르게 걷거나 달리게 되면 빽빽한 잔가지에 통증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이왕 마음 먹은 여행이라면 문명에 길들여진 습성은 집에 벗어 놓을 필요는 있다.





참 신기하지!

이끼 위에 또 다른 생명이 의지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끼는 이질감이 아니라 보호와 의지의 이불이었고, 이 계곡의 모든 만물이 소통할 수 있게 도와 주는 멘토이자 고독과 성장의 용기를 복돋워 주는 어머니 였다. 




계곡을 밟기 전 다짐했던 괴롭힘 없이 조용히 느끼고 자리를 떠나는 약속을 지키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길은 서로 어떠한 대화도 없이 가슴 속에 풍성한 선물을 한아름 안고 걸었다.

어떤 현자라도 감탄사와 겸허 외엔 가식과 자만이었단 걸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걸까?



한길로 내려와 다시 갈 길을 올려다 봤는데 엥?!

여기까지 자전거로 왔다는 건가?

그저 대단할 뿐이다.

잠시 빵 한 조각으로 가벼운 허기를 달래고 만항재로 가는 중에 이끼 계곡을 찾다 처음 유턴했던 오르막길에서 이들을 지나치게 되는데 조금 지친 기색은 있지만 충분히 화방재로 오를 것 같았다.



화방재 삼거리에서 만항재 방면으로 급격한 좌회전을 한 후 오래된 듯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만항재로 방향을 틀자 산 속의 들판이 가을로 무르익어 간다.




만항재로 거의 다다르면 이렇게 높은 고도를 실감할 수 있는 까마득한 산 아래가 보이고 역시나 평지에서 찾기 힘든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려 한다.

한낯 신록이 빠지며 잠시 움츠러 드는 나무들인데 그 자태가 모여 수 많은 빛깔을 채색하는 이치가 단편적이고 짧은 안목에 흥분하는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하늘 높고 지천은 오색찬란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그 매력에 마력이 걸린 마냥 혼을 빼놓고 가을을 만끽하는가 보다.



만항재의 정점을 찍고 태백으로 살짝 방향을 틀며 내리막길로 접어 들자 텅빈 너른 공원이 눈에 들어와 차를 세워 놓고 골목 대장처럼 앞장 서서 공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이 곳에서 여름과 가을이 서로 만나 흥겨운 파티에 빠져 낯선 이들이 온 줄도 모르는 눈치다.

급히 아이폰을 꺼내 지도를 펼치자 바로 함백산소공원에 현재 위치를 찍어 버린다.

우리와 거의 비슷한 타이밍으로 도착한 두 명의 중년 여성은 자전거를 타고 태백에서 이곳까지 왔단다, 대단!

응원을 해 주자 지쳐 털썩 주저 앉던 한 여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생생하게 자전거를 몰고 응원을 받으며 다시 갈 길을 재촉해서 만항재 정상으로 향하는데 이미 일행 몇몇은 도착해서 쉬며 기다린단다.




중년 여성들의 뒷모습을 보고 우리도 갈 길을 재촉해야 하기에 잰걸음으로 공원 내부로 돌격, 야생의 숲과는 다르게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억새와 자욱하게 깔린 낙엽, 이끼와 야생의 키가 작은 풀들이 빼곡하다.






공원 깊숙한 곳에는 야외 무대라고 하기엔 좀 작은 아담한 공간이 있어 자리를 잡고 음악을 틀어 놓자 가을향이 더 짙어졌다.

바로 옆엔 한창 가을 털갈이 중이신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는데 티워니의 몇 가지 필름 시뮬레이션으로 담았다.

각각 다른 느낌의 가을이면서도 어느 하나 덜 매력적인 건 없고 늘 옆에 두고 싶은 매력쟁이 뿐이다.



펼쳐 놓은 자리 옆으로 거미 하나가 열심히 행진하고 어느 누군가 방문하지 않은 흔적처럼 자잘한 나뭇가지 조각과 낙엽들이 세찬 바람에 그 때마다 자리를 비워 주고 들어 찬다.

앉아서 쉬던 이곳엔 천막 같은 게 둘러 쳐져 있어 음악 소리는 마치 라이브 콘서트장처럼 공명이 되는데 때마침 이문세의 '사랑은 늘 도망가' 노래가 문세 행님이 통기타를 둘러 메고 우리를 위해 개인 콘서트를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 너른 공원에서 우리만 가을을 즐기듯 크게 음악을 틀어 놓고 가끔 흥얼거리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따라 부르거나, 때론 여독에 잠깐 졸아도 누구 하나 지나치는 사람이 없어 마음 편한 공간을 언제 누렸던가 싶다.

미리 가져간 빵을 뜯어 먹으며 이끼 계곡 이후 앞만 보며 달려 왔단 사실에 급격히 이완되는 긴장감을 주체할 수 없어 갓 구워내고 추출한 것들이 전혀 부럽지 않을 만큼 메마른 빵 조각과 이미 식어 버린 텀블러의 커피가 만찬과도 같아 남김 없이 뽀개고도 모자랄 정도 였으니 그제서야 밀려 드는 허기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당시 가장 아쉬웠던 건 해가 서산으로 뉘엇뉘엇 기울어 가을 대기가 저녁을 기다렸다는 거다.

시간이란게 잡을 수도 없고 밀 수도 없어 그래서 더 아쉬운 건가?

오후 5시가 가까워져 도착했고 잠시 걷고 앉아 있는 사이 30분 가까이 흘러 버린 그 시간이 더 눈 깜짝할 만큼 짧게 느껴져 마냥 체념할 수 없잖아.

점심 이후로 여기 와서야 빵 한 조각 뜯었으니까 얼마나 허기지고 갈증이 타오를까?

태백에 들러 저녁 식사까지 계획했던 만큼 이 날의 아쉬움은 기억과 깨달음 만으로 충분했다.

끝내 떨칠 수 없는 아쉬움에 뒤돌아서 바라본 공원은 더 가을스러워 더 집착으로 유혹했다.



공원을 둘러 보기 위해 세워 놓은 차에 돌아오자 함백산의 늠름한 자태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 찼다.

만항재 자체가 워낙 지대가 높은 곳인 만큼 그 높고 거대해야 될 함백산이 마치 동네 뒷산 같아 '애걔걔'스러운데 태백을 내려가는 도로-작년에 오투리조트를 거쳐 그 길로 왔었지-를 타노라면 그 높이에 실감하게 된다.

이 사진을 끝으로 태백에서의 흔적이 전혀 없는 건 급하게 지는 해에 쫓겨 태백황지시장에 들러 실비식당에서 한우로 포식하고 시장을 두루두루 둘러 보곤 제법 밤이 기울 무렵 가깝지 않은 통리역을 지나 백암온천으로 떠나는 빼곡한 일정 때문에, 한우 구울 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이미 깜깜해진 밤엔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절대 무서워서가 아님-이었다.

가을에 호흡하는 태백 공기가 명약이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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