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남원에서 오를 때보다 더 가파른 도로를 굽이쳐 내려와 어느덧 경사길이 완만해 질 무렵 차량 지도에는 천은사가 표기되어 있고 그 옆은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구례 여정에서 지낼 숙소는 미리 예약한 야생화 테마랜드 내 숲속수목가옥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목적지가 가까워진 만큼 시간 여유가 있어 861지방도 인척에 있는 천은사에 들르는 건 부담이 없었다.
도로와 지척에 있는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얼마 걷지 않아 바로 천은사에 도착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초입부터 인상적인 풍경으로 인해 도보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사찰까지 세세하게 주변을 둘러 보며 30분 정도 소요됐다.
주차장에 차를 두면 바로 천은사가 어느 방향인지 초입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
입구 바로 옆은 절정의 단풍이 시선을 유혹하고, 입구와 나란히 진행하며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산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은 양옆에 소나무가 빼곡히 서 있는데 얼핏 봐도 수십 년 이상 자라 키가 꽤나 컸다.
입구 바로 옆 단풍의 자태가 멋져 사진을 찍는 사이 고맙게도 한 커플이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잠시 기다려 준 걸 뒤늦게 알아 채고 얼른 자리를 피하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고, 그 후 천천히 걸으며 천은사로 향했다.
입구에서 조금 걸어 도착한, 사찰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가 바로 수홍루 였다.
저수지와 강이 만나는 지점 위로 자리 잡은 수홍루는 단아한 자태를 가지고 저수지의 호수를 전망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데 해가 기울 무렵 호수에 빠진 태양이 뿌린 빛은 수홍루의 실루엣을 더욱 선명하게 규정 짓고, 이어 무협지에 나올 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강과 호수, 길과 강 건너 길을 이어주는 위치에 서서 누각을 인 채 지리산에서 내려온 자락의 여유를 한껏 증폭시켜 주기에 그 모습이 더욱 늠름하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여울 위에 외로이 매달린 나뭇잎은 겨울빛에 물든게 아니라 여전히 가을빛에 물들어 가을에 집착적인 내 속내를 읽고 있는 것만 같다.
소설 마지막 잎새 삘도 좀 나고.
천은사에 첫 발을 내딛자 깊은 산속 사찰 마냥 적막이 무겁게 맴돈다.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 였다니 감회가 새로운걸
티비를 혐오하는 내가 감각적인 대사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음 회차를 손꼽아 기다리던 작품 아니더냐.
드라마 촬영 때처럼 천은사엔 인적이 전혀 없고 오로지 내가 딛는 발자국 소리가 무척이나 사치스럽게 울렸다.
법당 옆으로 자그마한 쪽문을 지나자 템플스테이 구역으로 가는 길이 있고, 그 길가엔 훤칠하게 자란 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을 걸어 템플스테이 출입구에 다다랐는데 관계자외 출입금지란다.
여기까지 왔는데 까치발 들고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억눌러 금지 구역에 첫발을 들여 놓고 다른 세상에 온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아주 천천히 발을 옮겼다.
템플스테이 구역은 여전히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다만 그런 적막에 눌려 발자국 소리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4개의 관은 한결 같이 민낯의 나무가 떠받히고 있는데 나무결에 입혀진 건 화려한 채색의 물감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 뿐이고 그 결과 만나 하나의 집채를 이루는 하얀벽은 나무의 역동적인 무늬를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추켜 세웠다.
잠시 나무 기둥을 손으로 쓰다듬자 거친 나무결이 의외로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템플스테이 구역을 나와 낮은 담장을 훑어보자 돌을 하나하나 쌓아 그 위에 기와를 얹어 놓았고, 담장 옆에 놓여진 큰 돌은 덩그러니 혼자가 아니라 다른 녹색 생명을 틔워 공존공생하고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각.
평소와 달리 느린 걸음과 특정한 목적지 없이 마음 닿는대로 발을 디뎠던 천은사에서 제법 오래 머물며 깊은 정적에 기대어 있던 가을 정취는 어쩌면 아무런 기대 없이 갔던 장소를 숨겨져 왔던 엘도라도로 바꿔 놓았다.
그간 도시 생활에서 콘크리트 색채의 피로도와 난무하던 소음에 길들여 졌던 감각을 리셋 시키기에 충분했고, 이색적이거나 다양한 볼거리로 현혹을 시키는게 아니라 지극히 포근하고 편안한 정취가 주는 안락함이 세상의 공존을 스스로 깨우치게 했다.
같은 시대, 같이 살아가는 공간임에도 감각에 전이되는 느낌은 너무 극명하게 달랐던 만큼 마치 온천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짧은 시간에 극단의 짜릿함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나는 얼마나 이 친근한 적막에 몰입 했던가.
가을이 춤추는 천은사를 빠져 나오자 퍼뜩 정신이 들어 연꽃빵을 사서 잰걸음으로 일행에게 갔다.
근데 은근 허기가 졌던지 연꽃빵 맛이 꿀맛 저리가라다.
야생화 테마랜드를 관통하여 공원 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숲속 수목가옥은 무주 향로산 휴양림과 더불어 높지 않지만 가파른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개성 넘치면서 찰지게 꾸몄다.
약간의 우풍과 한밤에 들리는 자연의 소리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휴양림 숙소의 매력으로 재해석 된다.
겨울철 우풍이 부담스럽다면 휴양림 내 휴양관이나 인정 받은 깔쌈한 호텔이 낫겠지만 모처럼 도시를 탈출하는 여행이라면 이런 특색 있는 숙소가 엄청나게 재밌고, 시설 또한 미려한데다 각종 집기류도 기본 이상에 청결은 기본이었다.
이번 구례 여정은 그저 지나다니는 길목의 겉치례 정도로 알고 있다 거대한 지리산 산세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지역이라 여겨 이미 몇 개월 전에 결심 했던 만큼 평소 긴 동선의 여행과 달리 지리산과 함께하는 굵직한 명소만 누리고 아쉬운 부분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 된다.
그나저나 구례에 도착과 동시에 날씨는 포근 했지만 옅은 미세 먼지로 인해 도리어 지리산의 산세가 어렴풋이 비춰져 더욱 신성한 어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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