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비 내리는 날, 아까시 향 가득한 산책_20240506

사려울 2024. 7. 10. 02:19

올해 마지막 향기 불꽃을 태우는 아카시는 강한 빗줄기에 진화되고, 그렇게 작별의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유난히 짙은 향을 명징한 기억으로 남겼지만, 유별나게 강한 봄비 속에 사라져가는 많은 봄의 흔적들은 그렇게 말끔히 잊혀져 버렸다.
동탄에서 오산까지, 다시 오산에서 동탄으로 빗속을 걸으며, 아카시 향수를 맞는 행복, 괜히 청승이 아닌 삶에서 결핍에 대한 고찰이라 하겠다.

봄비치곤 꽤 많은 양이 지속적으로 내렸지만 큰 우산 하나 들고 밖으로 나와 오산천변을 따라 오산으로 걸어갔다.

자전거를 이용해 뻔질나게 다니긴 했어도 걸어서 오산까지는 처음이었는데 지난번처럼 아까시 향에 취해 처음으로 도전해봤다.

특히 사랑밭 재활원 부근 수변엔 아까시나무가 많아 곧장 거기로 향했는데 굵은 빗줄기에 꽤 많은 꽃이 떨어졌다.

금반교를 지나자 아까시 가지가 부러져 길막을 했는데 그 가지에 어찌나 많은 아까시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지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눈높이에 아까시 꽃이 잔뜩 달려있었다.

워낙 향이 강해 내리는 비가 아까시 향수가 아닌 착각이 들 정도.

금반저류지 공원을 지나 공장이 몇 개 있는데 그 옆 수변에도 온통 아까시 꽃으로 도배되어 특유의 달달하고 향긋한 내음에 취하자 어디선가 자신감이 불쑥 튀어나와 오산까지 다녀오는 게 충분하다는 확신이 벌써부터 압도했다.

금반저류지 공원에서부터 오산초입까지 약 3km 조금 안되는 구간은 거의 직선으로 뻗은 길에 뚝방길 특성상 지대가 높아 적당히 주변 조망도 하면서 체력적 부담은 거의 없었는데 걷는 내내 아까시 향은 집요하게 동행했다.

이 향이 얼마나 매력적이었길래 일년 동안 그리워하다 요맘 때면 반가운 친구를 만난 양 아까시 향을 반기기 마련이었다.

물론 더 깊은 내면엔 어릴 적 시골 뒷산에 아까시 나무가 많아 요람기 추억 팔이도 있었기 때문.

요 며칠 동안 세찬 바람을 동반한 비가 많이 내려 잘 부러지는 아까시나무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가지들이 부러져 길위에 축 늘어진 진풍경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렇게 비교적 굵은 가지가 부러져 무성하게 달린 아까시 꽃들이 땅에 쳐져 나뒹굴기까지 했는데 리틀 포레스트에 보면 아까시꽃을 튀겨 먹는 장면이 기억나 그 맛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많은 비가 내려 자연스럽게 세척된 게 아닌가 싶었다가도 내 소유가 아니라 함부로 슈팅하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오산천엔 이렇게 풍부한 자연 녹지가 형성되어 그나마 다른 생명의 안식처 노릇을 톡톡히 했다.

5월 초에 벌써 녹지가 우거졌다니 한여름이면 얼마나 빼곡하고 짙게 바뀔까?

멀리 제2외곽순환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이 시원스럽게 질주했다.

아까시 꽃과 향은 쉴새 없이 반복되며 걷는 피로감을 속속들이 훔쳐갔다.

다만 차이라면 아까시나무의 크고 작은 정도일 뿐 꽃이 탐스럽게 열리긴 매한가지였다.

빗줄기가 부쩍 가늘어져 우산을 접고 걸어도 불편하지 않았는데 일기예보에선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단다.

한참을 걸어 고속도로와 오산천2교 사이 미루나무가 멀뚱히 서 있는 곳에 오면 잠시 아까시 나무의 향연은 멈췄다.

이 또한 어릴 적 추억이 선명했던 게 집 마당에 엄청나게 큰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다른 나무들은 감히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높았다.

그 중에서도 집 앞마당에 미루나무는 넘사벽이라 왠만큼 비가 내려도 그 밑엔 한참 지나 비에 젖을 만큼 키도 컸고, 가지가 무성히 뻗어 거기에 달린 이파리는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가을이면 학교에 낙엽 더미를 들고 간 과제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과제물이 '낙엽 담아가기' 였다.

뚝방길 바닥에 이런 달팽이가 많아 걸을 때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했다.

실제 자전거나 발걸음에 압사당한 달팽이가 많아 괜히 불쌍불쌍하게 여겨졌다.

워낙 금방 자라고 높게 자라는 미루나무는 이 정도면 수령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벌판에서 눈에 띄일 만큼 멀대처럼 키가 컸다.

동탄호수공원의 지류인 송방천이 합류하는 구간에 왔다면 행정구역상 화성이긴 해도 오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와 같았다.

오산에 진입하여 장실이 급해 하는 수 없이 가던 방향으로 더는 진행하지 못하고 금오대교 건너 중고차 매매센터의 식당가로 향했다.

집에서 나올 때 커피로 샷 3개를 내렸고, 그게 이뇨 작용을 왕성하게 만들어 버렸다.

연일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지 평소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던 고수부지와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이번 도보 여정은 금오대교를 반환점으로 오산천 건너 천변 산책로를 따라 돌아가야만 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공공 장실이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전진을 멈춰야 했는데 그렇다고 안타까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산으로의 첫 도보 여행치곤 소기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오산천 산업단지가 있는 구간은 휴일이라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때마침 그 구간을 지날 무렵 빗방울이 굵어져 마주친 사람은 단 한 명, 그 분은 비를 맞고 조깅을 했는데 내가 향하는 방향인 동탄2신도시로 급히 사라졌다.

산업단지 인근 오산천변은 인위적인 정비가 되어 아까시 나무는 거의 없었고, 잔디밭을 배경으로 인위적으로 조경되어 각종 나무와 꽃들이 뿌리를 내렸다.

수국이 벌써 핀 건가?

클로버 위에 빗방울이 심약한 빛을 굴절시켜 보석을 뿌려 놓은 것 마냥 영롱했다.

테라스하우스 단지를 지나 금반교를 지날 무렵 여기에도 아까시 가지가 꽤 많이 부러져 길바닥까지 축 쳐졌다.

아까시 꽃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게 자연의 이치라면 받아들이고 다시 일 년을 손꼽아 설레며 기다리는 수밖에.

사랑의 교회 옆 저류지 공원을 지나며 약 13.5km의 도보 여정을 마무리했고, 이 기억을 되새기면 농염한 아까시 향에 대한 기억도 덩달아 되살아났다.

예전엔 생태 교란종이라 천시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이렇게라도 이 땅, 이 공간을 향기로 채우는 아까시는 분명 희열을 주는 존재였다.

반응형

'일상에 대한 넋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냥이_20240509  (0) 2024.07.10
냥이_20240507  (0) 2024.07.10
냥이_20240505  (0) 2024.07.09
학업_20240504  (0) 2024.07.09
장례식장_20240503  (0) 2024.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