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한가위 노을 아래 곡교천 은행나무길_20240916

사려울 2024. 9. 24. 22:41

올여름만큼 '기록', '역대'라는 말을 남발한 적이 있었을까?

완연한 가을로의 길목인 한가위 연휴조차 폭염의 맹위에 가을이 올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일 한여름과 같은 후덥지근한 폭염도 모자라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 도저히 참지 못해 9월 초 며칠을 빼곤 에어컨이 열일하는 여름이자 초가을이었고, 때마침 한가위 연휴를 맞아 큰누님이 홀로 친정집에 행차하시어 큰 마음먹고 동탄과 가까운 명소인 아산 곡교천으로 출발했다.

내 신조가 더울수록 땀을 흘려야 더위에 둔감해지며, 겨울 또한 추울수록 활동을 해야 몸이 움츠러들지 않을 뿐더러 그런 가운데 겨울의 신선하고 순도 높은 추억이 쌓이는 벱이라 아산 곡교천 나들이를 제안하자 모두 덥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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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겨울 작품, 곡교천 은행나무길_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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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을 만날 결심, 곡교천 은행나무길_20240614

바람이 많은 날에 문득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걷고 싶었다.곡교천에는 강물이 흐르고, 거리엔 바람이 꿈틀거리고, 허공엔 하늘이 흐르는 곳.덩달아 사람들도 은행의 녹음 제방 사이로 흘러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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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고속도로 소통이 넘무나 원활해서 1시간 조금 걸리지 않아 곡교천에 도착했다.

폭염 기세가 워낙 막강해서 그런지 연휴임에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오마니께서도 체력적인 부담을 느껴 오래, 멀리 걷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다.

은행나무 가로수길에 발을 들이자 울 가족님들께서 감탄사 연발하신다.

그도 그럴게 멋진 은행나무길 대부분은 이렇게 긴 구간이 없거나 아니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은행나무숲이라 하나 같이 훤칠한 키에 정갈하게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가 신기했나 보다.

이렇게 은행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서 조만간 동네 난리 나겠지만 그래도 그 악취는 잠깐인데 반해 선명하게 각인되는 기억과 추억이 오래 남는 곳이 바로 곡교천 은행나무길 아니겠나.

지난 초여름 방문 당시 축제와 함께 여러 종의 꽃들이 이 공간을 채웠었는데 그런 기억이 무색할 만큼 뎁싸리와 가을꽃이 가득 들어찼다.

근래 재평가받는 뎁싸리는 가을에 특히나 그 계절의 빛깔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고운 빛으로 물들어 더불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겼다.

아직은 초록 일변도에 변할 것 같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하나 같이 꿈꿔왔던 계절의 빛깔을 자랑하는 게 바로 이 뎁싸리 아니겠나.

다행이라면 폭염 속에 위안이 되는 하늘이었다.

자욱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음에도 대기는 청명하고 어둑하지 않아 강한 햇살에 주눅 들었던 저마다의 컬러를 뽐내기 바빴다.

언제 봐도 감탄할만한 은행나무 가로수길로 인해 이 길을 품은 아산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로 잰 듯 정갈하면서도 비슷하게 하늘로, 곧게 뻗은 길로 늘어선 이 은행나무의 행렬은 모든 계절을 통틀어 변하는 자연의 정직하고 강직한 색채를 과감 없이 드러내 손꼽아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근래 하나둘 불을 밝히는 빈 폐가들이 카페로 탈바꿈하면서 동시에 터전을 잡은 냥이들도 눈에 띄었다.

예전과 달리 갈수록 냥이들에 대한 편견이 호의로 바뀌어 사람들의 애정 어린 눈빛과 손길 또한 연이어 이곳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찰나 오마니와 누님이 가련한 어린 삼색 냥이를 발견하여 돌아가는 길에 여전히 벤치에서 떠날 줄 모르고 자리 잡았었는데 결국 미리 터전을 잡은 냥이들에게 쫓겨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라 그 애잔함을 참지 못하고 후딱 차량의 트렁크에 싣고 다녔던 밥을 가져왔다.

녀석 또한 잠시나마 다른 위협에서 충분한 보호가 될 거라 확신했는지 오마니 발치에 붙어 있었고, 치즈냥이 다가와 고압적인 눈빛을 보내자 잠시 피하는가 싶다가도 중간에 끼어든 내 발치에 다시 붙었다.

녀석들의 살아가는 방법이라 다른 녀석한테 위협할 수 없었음에도 어린 삼색이의 처량한 삶에 나도 모르게 중간으로 끼어들어 치즈가 다가오는 걸 막는 것 외엔 지나치게 개입할 수 없는 심정을 이해해 주겠지?

한쪽으로 걸어갈 때 벤치에 몸을 웅크린 걸 용케 기억하시곤 돌아가는 길에 녀석이 있던 벤치에 앉아 쉬시는 울 가족님들 마음씨에 좋아요, 구독 한 번 날렸다.

또한 이런 치열한 야생의 세상에서 녀석이 얼마나 다부지게 버틸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지만 이게 자연의 논리라 개입할 수 있는 부분도 한계가 있어 숙연해졌다.

냥이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구현할 수 없는 귀염과 더불어 가련함도 동시에 있는, baby schema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검증이니까.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는 오스트리아 동물 행동 및 심리학자인 콘란트 로렌츠가 정립한 개념으로 큰 눈과 둥근 얼굴, 작은 코, 따뜻함, 부드러움 등의 유아적 특징을 말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 귀엽다고 말하는 존재들의 공통적인 요소이기도 한데요.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살아갈 힘이 생기기 전까지 어미의 보호를 받는 모든 포유류나 조류들에게 베이비 스키마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귀여움이 생존을 위한 무기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하지만 성체가 되면 이러한 특징들이 거의 사라진답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류와 조류들은 성인, 성체가 되면 베이비 스키마의 특징이 사라지지만 예외로 고양이들은 다 커서도 작고, 귀엽고, 부드럽고, 둥근 특징이 유지된답니다. 이러한 고양이의 매력을 진작부터 알아차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고양이는 신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이 정도면 고양이는 갓 태어난 새끼일 때도 다 자란 성묘일 때도 귀여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인정해야 될 것 같아요.
[출처]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_DK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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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baby schema를 처음 알게 된 건 거대 냥이, 나응식 수의사쌤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왜 성묘들이 귀여운지, 그리고 그 귀여움을 통해 내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게 되었다옹~

생수와 밥, 그리고 햇반 그릇을 가져와 오마니 발치에 담아주자 녀석은 엄청난 포식을 자랑했다.

역으로 얼마나 굶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한 움큼을 모두 해치우자 오마니께선 다시 한 움큼을 담아주셨고, 그것마저 깨끗하게 비운 뒤 담아준 물도 꽤나 많이 들이켰다.

두 번째 담아준 밥조차 적은 양이 아니었음에도 코를 박곤 모조리 비울 정도로 녀석의 고단한 길에서의 삶을 방증시켜 줬다.

또한 얼핏 봐도 6개월이 안 된 어린 냥이라 더 측은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중에 치즈가 데크 아래에서 다가와 은행나무 가지에 뚫린 틈을 비집고 다가왔고, 녀석에게도 한 그릇 담아주자 녀석 또한 그걸 비운 뒤 삼색 냥이한테 다가서 고압적인 눈빛을 발사해 어린 삼색이가 낮고 위협적인 냥이 특유의 '웅'하는 소리를 내다 몇 번 하악질을 한 뒤 다른 벤치로 도망갔었는데 그럼에도 치즈 녀석은 어린 삼색이를 쫓아갔다.

물러설 곳이 없던 어린 삼색이가 연이어 하악질을 할 무렵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일촉즉발의 상황을 와해시켰는데 치즈 녀석은 이내 가로수길을 벗어나 뚝방 아래 민가로 사라졌다.

그 긴장감을 잠시 벗어난 어린 삼색이는 고마움을 표현하듯 가까이 다가와 바짓 가랭이에 연신 얼굴을 문질렀고, 잠시 동안 녀석의 긴장이 풀릴 수 있도록 거기에 머물러 산책의 피로감도 떨쳤다.

집으로 돌아갈 즈음 시간이 많이 기울어 서녘 하늘이, 아니 두터운 구름 사이 균열에 석양이 불을 질러 놓았고, 점점 그 불은 아름다움에 가슴을 두드렸다.

덩달아 시샘을 한 동녘 하늘에도 구름을 장작 삼아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는데 곧 쏟아질 빗방울의 응원으로 옅은 무지개까지 피어올랐다.

노을을 가르는 무지개가 도화선이 되어 점점 노을은 무지개를 타고 번지기 시작했고, 비록 여름 폭염의 기승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던 사람들도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지나는 무지개를 따라 시선을 맡겼다.

뚝배기처럼 오래 머무르며 천천히 감동을 주는 계절과 달리 무지개와 노을은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스치는 찰나에 벅찬 감동을 주며 무구한 자연의 거대한 힘과 포용에 그저 감탄사로 응답할 뿐이었다.

주차한 차량으로 돌아갈 무렵 작은 정원에 퍼질러 있던 치즈 남매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가족들이 내민 식사 한 끼에 적극적으로 다가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였고, 무심코 지나치던 한 쌍의 젊은 연인이 녀석들을 목격하곤 츄르를 가져와 내밀어 그걸 먹은 뒤 잠시 평온의 휴식을 취했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치열한 생존과의 사투를 벌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습과 표정에서 안도를 엿볼 수 있었다.

동녘의 무지개는 말 그대로 찰나의 불꽃처럼 사라졌고, 뒤따르던 노을도 절정의 불씨를 서로 나누며 지는 하루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서녘은 석양이 진 뒤 광활한 하늘에 흩뿌린 불씨를 하나둘 불러 모아 포근한 엄마의 품으로, 석양으로 총총걸음을 걸어 뒤따르고 있었다.

연휴의 정점을 지나 캔디처럼 달콤한 휴일을 곱씹으며 곧게 뻗은 멋진 은행나무 가로수길에 널린 행복의 카펫과 성큼 다가온 가을의 희열을 벗 삼아 또 한 번 아산에서의 추억은 견고한 성곽처럼 가지런히 쌓이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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