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대한 사색

독립의 의지가 담긴 노작 문학관_20240616

사려울 2024. 7. 23. 21:36

노작 홍사용 문학관에 들러 소위 멍 때리며 덤덤히 파란만장했던 한 족적을 응시했다.
글 속에 용해된 영혼들의 무거움을 작은 그릇으로 담을 수 없었지만 스미고 스쳤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규정할 수 없어도 영혼에 물든 그 공간에서 그렇게 여름의 흥건한 땀 대신 글의 숭고함에 잠시 젖었다.

 

홍사용은 1900년 음력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 151번지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홍철유(洪哲裕)와 어머니 능성(綾城) 구씨(具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관학교 1기생으로 합격한 부친을 따라 백일 즈음에 서울 재동으로 이주했다. 8세 무렵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아버지를 따라 생가 인근 마을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로 내려온다.
9세가 되었을 때, 후사 없이 일찍 돌아가신 백부 홍승유(洪升裕)의 양자로 들어갔다. 친부와 백부 일가가 용인과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소유한 천석지기였기에 홍사용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홍사용의 고향인 돌모루[석우리]는 주로 남양 홍씨들이 모여 사는 씨족 마을로, 용수골과는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수원 동남방향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있고, 마을 뒤로 주봉뫼라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현량포[현량개]라는 냇가가 있다.
홍사용은 학창 시절 고향에 돌아올 때 수원성 둑길을 자주 걸어오곤 했다고 한다. 화성(華城)은 광교천 위에 화홍문이 있고, 그 동편으로 연무정과 장군대가 있다. 지금도 옛 성에 봉화대 윤곽이 남아 있다.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에는 봉화대와 장군바위 등과 같이 고향의 여러 정경이 등장하는데, 홍사용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정신이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시 「통발」에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고기 잡던 천진난만한 아이의 경험이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 돌모루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홍사용은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1912년 13세에 2살 위인 원주(原州) 원씨(元氏) 효순(孝順)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혼인신고는 1915년으로 되어 있고 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후일 이 중 딸아이를 12세에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는데, 홍사용은 평생 조강지처에게 눈물만 안겨주었다는 술회를 남기기도 하였다.
홍사용은 1916년 홀로 상경하여 휘문의숙 2학년에 편입한다. 1918년 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면서 3학년이 되었고, 1919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하기 전 3·1운동으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4학년 정규과정을 마치고 6월에 고향에 잠시 돌아와 동학인 정백(鄭栢) 정지현과 같이 수필집 『청산백운(靑山白雲)』을 펴냈는데, 여기에서 홍사용은 ‘소아(笑啞)’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수필집에는 ‘현량개’를 비롯한 고향의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은거하며 독서에 열중하고 시상에 잠기면서 품은, 나라를 잃은 민족적 울분과 일제에 대한 반항의 정신이 홍사용을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해 12월 홍사용은 서울에 살던 학우 월탄 박종화와 주고 받은 서신에 습작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보내기도 하였다.
[출처] 노작 홍사용_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노작 홍사용과 그의 문학세계 -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정의] 경기도 화성시 출신의 일제 강점기 시인이자 연극인. [개설] 홍사용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노작(露雀)이다.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근대 시인이자 연극인이다.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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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오후를 보내던 중 발길이 어느덧 반석산을 넘어 노작 문학관에 닿았다.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 노작공원에서 잠시 쉴 생각이었으나, 이른 폭염으로 인해 빠르게 더위를 식힐 방법이 절실하던 차에 문학관이 눈에 들어와 모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홍사용 문학관은 글의 혼이 깃든 곳이라 잊을만하면 가끔 들러 문학의 유희에 한 걸음 다가섰다.

거기에 이번엔 안한수 화백의 작품 전시까지 있어 호기심이 더했다.

우선 노작 홍사용 일대기와 작품집들을 둘러봤는데 당시 발간했던 작품집이었다.

올 때마다 점점 멋진 공간으로 진화 중인데 분위기를 보면 종이, 잉크, 서가 내음이 물씬 풍겼다.

일목요연하게 노작 홍사용 문학 세계가 담겨져 있었다.

방명록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방인지, 녀석이 얼른 기록을 남겨야 그 아래 줄에 잉크 자국을 남길 수 있는데 너무 느긋해서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작품이 수록된 시집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1923년 9월, 백조 3호                                                                                                         -노작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 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먹는 왕의 빰에 떨어질 때에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려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짧은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너 산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 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출처] 나는 왕이로소이다_위키문헌
 

나는 왕이로소이다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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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백조 동인 창작집.

평론가이자 문학가 경암 이원규의 흔적들.

슷비슷비한 시기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던 분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글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글을 보면 절대 굽힐 수 없는 기개가 문체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 가슴 찡하게 정독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진은 찍어도 플래시는 안되고, 휴대뽕은 진동으로, 아이들 손은 잡고.

냥이를 이미지메이킹해서 표현한 상상력도 대단했다.

안한수 화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소소하게 감상했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홍범도 장군.

친일파와 매국노들은 별 걸 가지고 트집 잡고 합리화했다.

피곤한 족속들이며 자신들의 만행을 어떻게든 숨기려 자국의 역사마저 왜곡했다.

본질만 바라보면 월매나 좋을꼬.

너희들이 나라를 팔아먹을 때 그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흘린 눈물과 피를 생각해 보렴.

수많은 점이 하나의 그림으로 재탄생되었다.

문학관 내부의 작품들을 문외한의 눈으로 감상한 후 거길 벗어나 뒤편 무장애길로 걸었다.

노작 홍사용 묘지를 지났다.

무장애길로 반석산에 오른 뒤 동탄복합문화센터 야외공연장으로 향하던 길에 만발한 수국이 완연한 여름을 말해줬다.

넘치는 더위가 어떤 존재에겐 고난이겠지만, 어떤 존재에겐 생명의 양분이자 필연이므로 그래서 여름을 탓하지 않았다.

야외공연장의 거대한 그늘 너머 폭염을 뿌리는 하늘이 보였다.

밤꽃이 더 이상 생기를 잃고 껍데기로, 그러면서 밤송이는 영글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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