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에 닿는 그 감촉에 걷는 피로를 잊게 되는 계절, 봄의 광시곡은 그렇게 휘몰아쳐 굳게 닫힌 사람의 마음도 스스로 열게 했다.
호수는 스치는 계절마다 내음을 기억하며 꿈을 꾼다면, 호수의 엷은 도화지에 꿈을 조각하는 생명은 그 꿈을 추억하며 환상의 안개에 꿈을 덧칠했다.
봄을 만나는 걸음인데 어느 한발 게으를 소냐
그로부터 총총히 길 밟아 무거운 발자욱 소리는 사뿐히 잠들었다.
초평호는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 있는 충북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며, 미호 저수지라고도 한다. 미호천 상류를 가로막아 영농목적으로 만들어진 초평저수지의 외형적 규모는 저수량이 1378 만 톤이며 진천군 관내뿐만 아니라, 멀리 오창, 북일, 북이, 옥산, 강서 등지까지 물을 대고 있다.
저수지 근처 한반도 지형 전망대에서 초평저수지를 바라볼 수 있는데, 저수지는 전체적으로 굴곡이 심한 ㄹ자 형태를 이루고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에 둘러싸여 있다. 저수지를 빙 둘러 나무 데크 산책로가 조성이 되어있고, 일출, 일몰 명소로도 유명하며 전망이 아름다워 드라이브하기에도 좋다.
[출처] 초평저수지_한국관광공사
호수변 넓고 매끈한 길을 걸으며 초평호를 바라보자 용처럼 힘차게 번뜩이는 호반의 선이 또 하나의 생명을 품은 듯 또렷했다.
호수와 산이 맞닿은 경계가 처음부터 날카로운 예기로 조각한 것처럼 음각과 양각의 질감이 시선으로도 충분히 직감될 정도였다.
초롱길은 초평저수지와 농다리에서 머리글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으로, ‘농다리 - 전망데크 - 수변데크 - 하늘다리 - 농암정 - 농다리’ 코스로 짜여 있으며 약 3km,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농다리를 지나면 초롱길인 수변데크가 나타나며, 이 수변데크는 평탄하여 유모차와 휠체어로도 편히 다닐 수 있다. 농암정에 오르면 초평호의 너른 전망이 펼쳐진다.
[출처] 초롱길_한국관광공사
호수 너머 산과 호수가 맞닿는 자리에 꿈틀거리는 초롱길 또한 선명했다.
실제 미세먼지가 살짝 끼어 대기가 조금은 흐리던 날이었음에도 초평호는 마치 다른 세상인 양 모든 존재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멀리 농암정이 양각된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실제 농다리 건너 농암정 아래 살고개를 넘어오면 가장 먼저 야외음악당을 만나게 되는데 대기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그 진원지가 야외음악당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초롱길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인파조차 질감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용처럼 꿈틀대는 초평호의 등에 업혀 모퉁이를 돌고 돌며, 휘어지고, 펴졌다.
멀리 하늘다리와 그 너머 먹뱅이산과 그 자락까지 어느 하나 희미하고 지친 선은 없었다.
야외음악당으로 걸어가는 길엔 미르숲과 달리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서도 충분히 가늠될 정도로 정해진 수순처럼 초롱길에 걷던 걸음을 이어갔다.
호수에 희미한 사람의 형체, 정말 사람이었는데 한가롭게 낚시 중이었다.
완전한 형체의 하늘다리를 마주했다.
단일한 형태의 다리가 아닌 출렁다리와 고정다리 두 가지가 혼합된, 흔히 하이브리드로 조망되는 모습은 예술 작품 같았다.
또한 이번 호수길 여정의 반환점이기도 했다.
야외음악당에 도착할 무렵, 한 어르신께서 저런 사진 찍으라고 하시어 거기를 쳐다보자 호수에 살짝 드러난 나무 가지에 자리 잡은 오리 가족의 졸고 있었다.
야외음악당에 도착하자마자 한 차례 잔치가 끝났고, 그 기념으로 공연을 가진 사람들의 피날레를 끝으로 기념사진 촬영 중이었다.
청주 통기타 동호회 '여섯줄 바라기'란다.
이런 류의 공연 감상을 좋아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해 아까비!
야외음악당에서 시작하는 초롱길로 접어들었는데 용의 형상을 한 호수변이라 용의 척추에 허락을 받아 초롱길을 얹은 셈이었다.
초평호가 골짜기 쪽으로 움푹 들어가는 만의 형태에 접어들었다.
주말이라 인파는 꾸준히 어어져 강물 흐르듯 그 인파도 여울처럼 흘렀다.
약속한 것처럼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흘러 마치 농수로의 유수 같았다.
미호강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의 시작점에 하얀 봄이 폈다.
소생하는 신록의 시작, 그 시작은 점에서 점차 물들어 나갔다.
여전히 낚시 삼매경에 빠진 강태공들.
걸음의 개수만큼 가슴 속의 뿌듯함도 늘어나는 재미, 그 재미를 탐닉하는 사이 점점 하늘다리에 가까워졌고, 아쉬움도 함께 삼켜야 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鎮川 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말인데, 그만큼 진천군은 예부터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진천 지역에서도 특히 진천읍 삼덕리는 진천군 쌀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 마을이다. 우리는 삼덕리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시는 이상일 할아버지와 지숙현 할머니에게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유래를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두 분이 들려준 이야기는 문헌에 나와 있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출처] 생거진천_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진천문화대전)
하늘다리를 건너가면 작은 매점과 카페가 있었는데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잠시 머물 자리도 마땅찮을 만큼 손님이 꽤 많아 다시 하늘다리를 건너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진행했다.
하늘다리엔 이렇게 스뎅에 생거진천을 천공하여 나무데크에 박아놓았다.
진천의 모토 생거진천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밀고 있는 모토였다.
초평호반 산세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지형이라 길은 좁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짧은 구간이나마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다만 호수가 만든 절경은 한결같이 따라붙어 힘들게 오르는 충분한 대가를 보상했다.
급격한 경사도가 완만해져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겨 뒤돌아 호수 방면을 바라봤다.
봄이라 아직 이파리가 트이지 않아 호수 조망이 가능했지만 녹음이 들기 시작할 무렵엔 나무가 우거져 호수 조망은 쉽지 않겠다.
짧은 거리와 시간이 소요되는 오르막길이지만 숨이 가쁜 건 매한가지.
허나 능선 조망대에 도착하면 가쁜 숨과 힘든 과정은 금세 잊어버렸다.
능선 조망대에 올라 한숨을 삭혔다.
작은 쉼터는 농다리가 있는 미호강과 초평호를 가르는 장벽과 같은 능선의 중심이었고, 또한 미르숲의 연장이기도 했다.
하늘다리에서 가파른 산길을 거쳐 약 0.4km를 올라왔는데 산길은 늘 그렇듯 4km는 되는 착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능선길로 걷던 중 3년 전에 들렀었던 두타산자락 한반도 지형전망대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를 잊기 위해 찾았던 추억의 장소라 내겐 각별했다.
능선길에서 멋진 자태의 초평호는 여전히 관망 가능했지만 전체적으로 우거진 숲이라 봄이 지나 여름이 되면 일대 조망은 쉽지 않겠다.
누군가 가지를 분질러 꽃송이를 꺾어 놓았다.
그냥 좀 놔두지!
앞서 초롱길을 통해 하늘다리로 가던 중 초평호와 미호강을 잇는 작은 고갯길의 뽀얀 꽃이 만발했던 곳이 지층학습원을 지나 여기로 연결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에서 내려와 야외음악당과 연결되는 임도로 걸었다.
임도에 합류하여 야외음악당과 살고개 방향으로 걸었다.
농다리, 초롱길, 야외음악당 일대에 그 많던 사람들은 한길 벗어나면 거의 보이질 않아 누리며 걷기엔 최적이었다.
여긴 이제 벚꽃 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야외음악당에 거의 다다르자 좀 전보다 벚꽃이 더욱 만개했다.
아마도 양지바른 땅이라 이른 만개가 가능했겠다.
앞서 야외음악당을 들렀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살고개로 향했다.
살고개 너머 농다리까지 300m 거리라 미르숲과 초평호 일대는 전부 인척이라 가볍게 산책하기 최적이었다.
그래서 생거진천이 허튼 말이 아니란 걸 걷는 동안 점점 깨닫게 되었다.
농다리 살고개(용고개) 전설
현재 저수지에 수몰된 화산리에 큰 부자마을이 있었는데 한 스님이 시주을 청하였으나 쇠똥을 주는 등 행패가 심하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스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앞산을 깎아 길을 넓히면 더 큰 부자마을이 된다”라고 하여 이에 마을사람들이 그 말대로 하니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이후 마을은 망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이 일대의 지형이 용 형상을 띠고 있는데 스님이 말한 이곳이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을 깎아 길어내어 용이 죽었다고 하여 '살고개'라고도 불리운다. 이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와 액운퇴치, 소원성취,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기 위하여 돌을 쌓고 나무에는 오색헝겊을 걸어놓은 성황당이 만들어졌다.
가을수확 후 떡을 만들고 정화수와 함께 이곳 성황당에서 기원을 올렸고, 지나가는 길손들이 하나하나 돌을 쌓으며 기원을 드리는 장소가 되었다.
[출처] 살고개_인터넷진천자치신문
살고개는 그리 높지 않아 무장애길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농암정으로 오르는 우측은 출입 금지 상태였고, 좌측은 서낭나무가 있었다.
실체 유무를 떠나 마을 이야기는 애써 부정하기보단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종교이자 철학의 부산물이라 흥미로웠다.
이길로 오르면 농암정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농암정은 출입금지라 보는 걸로 만족했다.
잠시 같은 길로 동행했던 새와 이내 작별했다.
살고개를 넘어 다시 농다리를 만났고, 오전에 비해 인파는 더욱 길었다.
신록이 동반된 봄의 정취는 더욱 아름다워 사진으로만 봐도 현장에서의 설레던 기분이 재현되었다.
꽃 못지 않는 은은하게 아름다운 신록이 바람과 함께 어울려 찰랑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미르숲과 초평호를 진득하게 즐기고 차에 돌아와 한숨 돌릴 때 한 커플의 모습이 그림 같았는데 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 다시 이 커플이 차 앞으로 지나갔다.
시작의 설렘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뿌듯한 마침표를 찍으며 출발!
용이 꿈틀대는 그림 위에 설 때, 봄이 퍼져 보드라운 향기가 쏟아졌다.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햇살처럼, 건조한 가운데 파릇하게 내리는 보슬비처럼 그 고운 상상의 직물이 신록의 물감으로 번졌다.
잠깐 걷는다는 생각을 금세 잊고 눈에 보이는 길의 유혹에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봄이 내게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가 봄 속으로 들어가 겨울 먼지만 남은 길을 흔들었다.
이게 작은 행복이라면 난 그 행복 속에 단물을 삼키고, 거친 웅크림 속에 유들한 연체동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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