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치악_20230302

사려울 2024. 1. 3. 02:46

목표는 결과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산의 목표는 실체가 명확한 봉우리며, 그래서 목표를 실현시켜 주는 길은 그리 중요하게 않게 여길 수 있다.
치악산에 발을 들인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비로봉과 남대봉을 오르며, 처음 갖던 악명의 그림자는 익숙한 햇살에 걷히고, 이제는 경이로움만 남았다.
비로봉을 잇는 사다리병창길은 고작 1,288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악마의 탈을 씌웠고, 봉우리로 오르는 고난과 고뇌로 치부했지만 길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하며 기실 악마가 아닌 악명을 정복하기 위한 천사였음을, 이 길로 인해 꿈조차 사치로 여겨질 봉우리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더불어 양 옆 아찔한 절벽에 곡예사처럼 질주하는 '그' 길을 걷노라면 공포의 살얼음 넘어 어쩌면 인간도 실체가 불분명한 신이 아닐까, 성역은 엘도라도가 아닌 현실 한 켠과 진배 없다는 확신이 든다.
랜선을 타고 치악산 산행기를 훑어 보면 이구동성 매우 힘든 기색이 역력하지만 어쩌면 성취를 맛본 여유 섞인 투정 아닐까 여겨지는 게 결말은 늘 성취와 절경에 대한 찬양으로 맺는 한 편 희극이었다.
치악산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 내가 이래서 다행이다. 
 
* 해발 약 500m 세렴폭포에서 시작하는 사다리병창길은 정상 1,288m를 단 2.7km만에, 약 790m를 짧은 구간에 오르는 등산로로 병창은 이 지역 방언으로 절벽이다.
유일사코스 태백산은 670m를 3km, 구천동코스 덕유산은 1,000m를 8km 정도로 이 길에 서 보면 경사도를 체감하게 된다.

치악산 사다리병창길은 “매우 어려움”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남대봉 코스 중 영원사~남대봉 갈림길 구간을 체험한 바, 그 “매우 어려움”의 의미는 몸으로 익히 체득했기 땜시롱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마치고 치악산 구룡사 방면으로 진입했다.

구룡사에 주차한 건 처음인데 비교적 넓은 주차 공간에도 지난 방문 때는 주차 공간이 없어 초입 매표소에서 차량 진입을 통제했었지만, 이번엔 출입이 가능했었고, 실제 주차할 공간도 넉넉했었다.
차량을 주차한 뒤 준비-치악산행을 위해 성능 좋은 써모스 보온병을 구입했고, 그래서 컵라면과 뜨거운 물도 단단히 준비했다-를 단단히 마친 후 구룡사는 건너뛴 채 바로 비로봉으로 향했는데 구룡사 지나 약간 출렁이는 다리를 지날 무렵 백옥 같은 여울이 바위 사이로 힘차게 흘렀다.
3월 초인데도 치악의 겨울은 길기만 했다.

비로봉으로 가는 길에 대곡안전센터가 마지막 장실이라 거기서 육신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건 필수, 2.2km를 걸어 세렴폭포가 인접한 세렴안전센터에 도착했고, 고행의 시그니쳐가 되어버린 작은 다리를 앞에 두고 온갖 해리적인 잡념을 물리치고, 또한 마지막으로 장비와 몸을 체크한 뒤 첫발을 들였는데 여전히 겨울 자취가 짙음에도 빙판길은 아니라 아이젠은 백팩에 그대로 뒀다.

다리를 건너 이내 사다리병창길과 계곡길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고, 염두해 뒀던 사다리병창길로 선택. 바로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계단이 나오며 ‘난 그리 만만하지 않아’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계단 소재가 다 쓰였다는 은유적인 표현들을 익히 들었던 터라 계단의 형태는 익숙했는데 처음부터 고압적이었다.
그렇게 가파른 계단과 길을 힘겹게 시작했다.

가쁜 숨은 기본이고, 다리가 마음과 같지 않을 무렵 사다리병창길을 소개한 푯말이 나오며 아주 멋진 길이 펼쳐졌다.
좁은 바위 위를 지나는 길로 바위와 바위 사이도 연결했지만, 길을 단단히 부여잡은 나무의 뿌리도 한몫했다.

이 구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무성한 나무 덕분에 길옆 절벽이 주는 공포는 어느 정도 상쇄되었고, 위험 구간인 만큼 양옆으로 낙하 실험하지 못하도록 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좁고 양옆이 절벽과도 같은 바위 위를 지나는 길로서 형태를 직시하는 순간 존재의 필요성은 필연적이며 절대적이었다.

만약 이 길이 없었다면 어떤 식으로 우회해야 되고, 더많은 신경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연신 좁고 절벽 같은 바위길이 이어졌다.

이 구간은 두 개의 바위길을 연결하는 짧은 다리로 여기를 지나면 다시 익숙해진(?)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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