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휴가의 첫 여정은 경주에서 시작했다.
경주...
10년도 훨씬 넘은 경주에 대한 기억은 첫 관문 격인 경주 채색이 명확한 고속도로 톨게이트만 선명할 뿐, 도로를 달리면서도 다른 기억은 전혀 없어 당혹스러웠고, 그로 인해 외곽도로를 주구장창 달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청 방면으로 향했다.
초등 시절 수학여행의 고정 레파토리가 경주였었고, 2007년에 업무로 잠깐 살았던 걸 제외한다면 경주는 거쳐가는 관문이었으며, 그나마 친구들과 감포에 종종 들렀던 때도 90년대 후반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그 기억이 명징하게 남아 있는 것도, 경주가 전혀 바뀌지 않은 것도 더 이상한 게 사실이라 어쩌면 당시 순간의 기억이 정상인 게 맞겠다.
시청 부근 뚜레쥬르에 들러 간식을 마련하고 파편화된 기억을 더듬어 경주역 앞 번화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저녁 끼니를 해결하려고 겨우 찾았지만 한 때의 추억인 양 이른 밤이 무겁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재래시장 일부분이 야시장으로 탈바꿈하여 각종 먹거리와 더불어 누군가 맛깔나는 기타 소리에 맞춰 잔잔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다시 헤맬 뻔했다.
또한 중부지방과 다르게 한층 포근한 겨울 밤이라 차창을 열어 질주를 해도 크게 춥지는 않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도로 건너편에 차를 주차한 뒤 노랫소리와 불빛이 흐르는 시장으로 건너갔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텅 빈 거리와 달리 시장통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았고, 그 무리를 따라 걷다 문득 곱창볶음에 잊었던 식욕이 급 뽐뿌질하여 한 접시 담았다.
맛은?
단짠에 충실한 건 좋은데 그 단짠으로 인해 곱창 특유의 고소함은 거의 느껴지질 않았고, 곱창은 뭐가 그리 질긴지 이따금 섞여있는 대창이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느껴져 평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추억의 야시장 재현과 인플레이션을 거쳐오며 엄청나게 치솟은 물가 대비 저렴한 단가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밥 생각이 간절하야 경주역 반대 방향으로 주차한 차를 돌려 다시 경주역 방향으로 가던 중 야시장 못 간 지점에 국밥집은 아직 사람들이 붐벼 갓길 차량 한 대 정도 비어 있는 틈에 주차를 하고 들어가 곱창은 금세 잊고 다시 내장국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맛은 내세울 게 없는데 양을 대비해 본다면, 그리고 건더기 양을 본다면 여기 또한 가성비는 나쁘지 않았다.
내부엔 비교적 사람들이 많았는데 소주를 곁들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지 나와 관계없는 그들의 인생에 마치 내가 엮인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수한 사투리라 스트레스 지수가 꿈틀거리진 않았다.
회사를 통해 미리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여 조금 헤맨 뒤 프런트에서 체크인 하자 좋은 평을 위해 객실을 업그레이드해 줬다길래 들뜬 마음으로 숙소를 탐색했지만 앞서 헤맨 보람도 무색하게 다시 짐을 갖고 옆동으로 건너가야만 했고, 그래도 들뜬 마음을 간신히 삼키며 문을 열자 땋! 실내가 완전 개판이었다.
실내 분위기나 따끈한 온기, 너른 것까지는 좋은데 이불은 저따구에 싱크대는 요따구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근무하시는 분들의 소통 문제로 몇 분이 지나 허겁지겁 키를 들고 한 분이 달려오시어 이 또한 스트레스 지수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가장 설레는 여정 첫날엔 완전 대자로 뻗어 기절했었고, 켄싱턴의 많은 객실을 이용한 건 아니지만 여긴 오래된 건물치곤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자! 내일부터 겨울 여행의 대안으로 생각한 동해 여행이 기다리고 있응께 완전 피로를 벗어 버리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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