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겨울 갈매기 파도, 봉길대왕암_20240115

사려울 2024. 1. 22. 23:37

그나마 종종 찾던 감포 대왕릉은 그마저도 90년대 후반이었고, 초기엔 행정구역상 감포가 경주란 것도 모른 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당시 뻔질나게 만나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면 누구 하나 반문도 없이 기계처럼 감포 대왕암 해변에 무작정 찾았고, 차를 갖고 있던 녀석 또한 타산적인 감정 없이 스스로도 감포 여정을 즐겼다.

그런 대왕암 해변에 꽤나 빈번한 추억을 심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 버렸고, 그 길목에 암초와도 같았던 덕동호반 구부정길을 우회하여 매끈한 945 도로가 새로 들어섰다.

아침에 무중력과도 같은 가슴을 추스르고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타고 봉길해변에 도착하자 주차장엔 의외로 많은 차들이 주차 중이었는데 나처럼 겨울 바다의 뚝배기 같은 매력을 담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겐가?

계곡이나 산을 좋아하는 내가 겨울에 바다를, 특히나 동해 바다를 찾는 이유는
첫째, 눈 덮이고 지나치게 오지로 전락해 버린 산과 계곡보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오지의 싸늘함을 회피하기 위함이었고
둘째, 연중 바다를 거의 오지 않던 내가 지난해 봄, 해파랑길과 해안둘레길을 찾았다 간과했던 매력을 뒤늦게 알아 차린 게 이유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각 바다는 제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매력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고유 명사 격인데 이번 겨울만큼은 더욱 푸르고 수평선까지 광활하게 뻗은 동해의 매력을 느끼고 싶었다.

더불어 산과 바다 사이 넓지 않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켜켜이 이어진 해파랑길은 '모 아니면 도'라는, 온전히 산을 회피하는 이유를 넘어 그만의 매력을 알게 된 까닭이기도 했다.

봉길해변에 다다르자 주차장에 가득 들어선 차량에 비해 확실히 한산했다.

사람들이 적어서 한산하다기 보단 겨울 특유의 여백이 공간에 파고든 이유 아닐까?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갈매기떼가 언뜻 눈에 띄었는데 저마다 사진을 찍는 방법 중 몇몇 분들은 갈매기떼를 몰고 다니며 추억을 남겼다.

사진의 화각이 그리 넓지 않아 생각보다 큰 무리의 갈매기떼를 담을 수 없었지만 녀석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사람들이 가져온 특정 과자를 향해 무리 지어 움직였고, 역시나 꾀돌이답게 녀석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과자 세례를 퍼붓는지 일사불란하게 알려줬다.

갑자기 많은 갈매기들이 달려들어서 그런지 한 여성이 뒷걸음질 쳤다.

그래도 녀석들은 누굴 해하거나 협박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사람들이 과자를 풀지 않았겠지.

자세히 보면 갈매기 뿐만 아니라 비둘기와 까마귀도 보였는데 그중 특히나 갈매기 개체수가 많았고, 녀석들의 유별난 성격도 한몫했다.

간식 세례를 했던 여성이 자리를 뜨자 녀석들은 순식간에 자리를 뜨고 다시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닿는 해변으로 무리 지어 이동했다.

이렇게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대왕암 부근에도 한 무리 갈매기떼가 있었는데 교묘하게 하나로 묶이지 않고 두 개의 무리는 각자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이따금 갈매기 중 몇 마리가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별 소득이 없으면 매몰차게 돌아섰다.

이런 걸 보면 녀석들은 꾀돌이 맞다.

바다에 인접한 해변에 갈매기떼가 있다면 내륙 쪽 가까이엔 까마귀떼가 있어 묘하게 대조된 분위기였는데 까마귀 또한 갈매기 못지않은 꾀돌이지만 확연한 개체수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갈매기가 바다의 주무대여서 그런지 까마귀는 의외로 기가 죽은 분위기였다.

봉길해변을 알리는데 일조한 문무대왕릉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자리를 지키며 거센 파도와 맞서고 있었다.

때론 거칠고, 때론 잔잔한 바다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굴하지 않는 바다 위 작은 바위를 보노라면 설령 거기에 이야기가 주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에서 굳은 경의의 표본이 아닐까?

해파랑길 산책을 앞둔 내게 있어 깊은 추억 팔이는 될지언정 다리를 오래 묶어 둘 수 없어 떼기 힘든 걸음을 매몰차게 내디뎠다.

높은 산무리와 너른 동해 바다 사이 비좁은 틈에 어울리지 않는 동해 갯마을의 평온한 풍경을 뒤로하고 가장 힘들다는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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