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충청북도 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中央塔面) 용전리(龍田里)에 있는 사각 기둥 형태의 고구려비이다. 발견된 곳의 당시 행정 구역이 중원군(中原郡)이어서 중원고구려비라고 명명하였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주고구려비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있지만 5~6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충주고구려비는 오랫동안 선돌[立石]로 여겨졌기에 비가 서 있던 마을 이름도 입석 마을이었고, 비를 조사할 당시에도 일부 주민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충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호인들의 제보가 있어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삼국 시대에 제작된 고구려비임이 확인되었고, 1981년에는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충주 고구려비_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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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산에서 내려와 곧장 찾은 고구려비 전시관은 4년 전에 코로나 팬데믹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한창 공공장소 출입이 제한되던 시기라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던 곳이라 궁금증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난 곳이었다.
때마침 고구려 관련 축제 준비로 관계자분들과 함께 말(馬)이 축제 준비로 바빴고, 거기를 지나쳐 전시관에 바로 들어갔다.
전시관 앞에는 전에 없던 전망대 형태의 쇠 구조물이 있었는데 동행했던 친구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냉큼 올라 주변을 탐방하자 서 있던 모습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떠받치듯 괜히 늠름해 보였다.
내부엔 한민족의 기백이 절정에 달했던 고구려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이 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 열거되어 있었고, 그리 큰 규모가 아니라 조금 초라해 보이긴 했지만 고구려란 이름만으로도 그 벅찬 의미는 광활한 가을 하늘만큼이나 서슬 퍼렇게 울렸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명왕이 지은 최초 서정요인 황조가.
학창 시절 고대 문학 시간에 배웠던 "편편황조 ..."로 외웠었는데 그 황조가가 옹기에 새겨져 있었다.
소중한 문화재, 행렬도의 모습을 보면 당시 고구려인들의 넘치는 기백과 막강한 세력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돼지털로 복원한 건데 몇 안 되는 남은 작품이라 이 그림을 보노라니 고구려인들의 영혼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실제 충주 고구려비의 모습으로 학창 시절엔 중원 고구려비로 배웠었고, 이제는 통합된 충주가 되어 이런 역사적 사료를 통해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부터 한반도 중원까지 아우른 아득히 그리운 고구려가 떠올랐다.
문화를 자신들의 손으로 불태운 짱께들이 이제 와서 스펀지처럼 자기들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노력이나 그런 짱께들한테 민족을 갖다 바친 조선의 우매함, 결국 역사는 그들의 비겁함을 심판한다.
성리학에 미쳐 수 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자존감을 버린 조선이여, 중국에 혼을 묻고, 매국노들은 일본에 혼을 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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