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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의 비가 내리는 금성산성_20200624

아침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줄기가 정오를 지날 무렵부터 굵어져 금성산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작은 실개울을 만들었다. 전날과 같은 길을 답습한 이유는 내리는 비로 인해 텅 빈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용문에서 만난 굶주린 어미 고양이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교적 화창한 담양은 가지런히 정렬된 새침한 느낌이라면 비 오는 날엔 슬픈 곡조를 목 놓아 부르는 망부석 같은 느낌이었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빗소리는 상당히 정제되어 풍경과 달리 고요했고, 아무도 찾지 않은 산성은 희로애락을 극도로 배제하며 차분한 모습은 잃지 않는다. 어디론가 서서히 흘러가는 물안개는 지상에서 남은 슬픔을 모두 껴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도, 안개도 ..

성숙한 강변길, 관방제림_20200623

해가 지고 인공으로 조성된 불빛이 억제된 야망을 뚫듯 기어 나올 무렵 어느새 관방제림에 섞여 있다. 인공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이지만 마을에 한 그루 정도 있을 법한 멋진 나무가 관방제림에선 구성원 중 하나 정도. 무심히 밤 산책을 즐기는 담양 사람들과 달리 강변을 따라 늘어선 숲길 나무는 손끝에 묘한 쾌감을 두드렸다. 평범하게 자라는 나무가 인고의 역사를 거쳐 범상한 모습으로 바뀌며, 수동적인 생명의 거부할 수 없는 상처는 훗날 활자를 새기듯 시련을 거친 인내의 상징이 되고, 얕은 의지를 한탄하는 생명의 스승이 되어 버렸다. 메타세쿼이아길이 자로 잰 듯 오차 없이 정갈한 가공으로 걷는 동안 절도의 세련미를 배웠다면 관방제림 길은 아무렇게나 뿌리를 내려 도저히 가공이 불가능하였음에도 전체적인 그들만의 규율 ..

시간의 자취, 담양 메타세쿼이아길_20200623

걷다 걷다 다리가 지친 들 멈출 수 있을까? 잠시 멈춘 사이 길 위에 서린 아름다운 시간들이 흩어질까 두려워 사뿐한 발걸음을 늦추더라도 멈출 순 없다. 가을만큼은 아니지만 여름에 걷는 이 길도 막연히 걷다 가끔 뒤돌아 보게 된다. 가슴에서 미어터지는 아름다운 추억에 저미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이 끝나는 아쉬움에 비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참 부럽다. 많은 이야기들을 벅찬 내색 없이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공장, 서플라이_20200623

어떤 이에겐 추억의 향수가, 또 다른 어떤 이에겐 이색적인 체험일 수 있는 공장 카페는 근래 들어 꽤나 많이 탄생했고, 건물 특성상 너른 규모에 높은 천장을 무기로 기존 카페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어필한다. 테이블과 체어도 과거 공장의 분위기에 일조할 수 있도록 낡고 조악한 것들을 활용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잠재된 엔틱을 극대화시켰다. 커피맛은 그저 그렇더라도 감성에 대한 투자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과 저녁 식사 후 한눈에 들어온 공장형 카페로 간판도 엔틱하다. 모든 소품들은 하나 같이 재탄생하며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의자는 어디서 구했을까? 이런 형태의 카페에 발길이 붙잡히면 기어이 꼭 앉아봐야 된다. 출입문은 아니지만 카페 외관에서 4번 타자 격이다. 내부는 공장 분..

여유의 세계, 금성산성_20200623

이번 담양 여행의 목적은 국내 최고의 인공 활엽수림인 관방제림과 강천산과 이어진 산자락 끝에 담양 일대를 굽이 보는 금성산성. 소쇄원,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은 워낙 유명 인싸인데다 특히나 소쇄원은 광주와 화순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멀고 3년 전에 다녀온 터라 이번 여행 동선에선 고려하지 않았다. 지인과 저녁 식사 약속으로 시간이 촉박하여 금성산성 초입 보국문과 충용문까지 여행하기로 한다.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백팩 하나 짊어진 채 금성산성으로 향하면 산성 탐방 안내도가 나와 대략적인 잣대가 된다. 산길치곤 완만하고 너른 길이라 걷기 알맞다. 거기에 더해 이런 대숲과 나무 터널이 있고, 걷는 동안 숲을 쓸어 올리는 바람 소리는 곁들여진 음악과 같다. 나비 하나 나풀거리며 주위를 맴돈다. 20..

사람 흔적이 떠난 강천산 탐방로_20200623

담양에서 순창과 경계를 이루는 강천산 탐방길에 들어서자 마치 산속 깊은 오지에 온 착각에 빠진다. 아름다운 가을 모습을 두고 여름이 엄습한 강천산은 그야말로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물론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강천산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위성 지도만 챙긴 내 과오라 큰 깨달음을 챙긴 것도 여행에서 즉흥적으로 짜여진 각본이라 하겠다. 인적이 전혀 없는 용광로 같은 산중에도 내가 무심히 잊고 있던 여름 생명들이 엘도라도를 만들어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지극히 평이한 풍경이지만, 각별한 풍경이 되어 버린 서울에서 하나둘 사라져 버린 생명을 망각하며 점점 무심해져 간다. 길가에 기이한 돌탑이랄까? 담양에서 순창에 진입하여 강천산 탐방로를 향해 임도를 가던 중 이런 형상의..

영혼의 우산, 느티나무_20200616

촌의 농번기엔 잠시 쉴 틈이 없고, 휴식은 사치로 여긴단다. 양파를 수확하고 이내 모심기에 분주한 들판. 신록과 땀방울이 모여 들판은 풍성해지고, 밥상은 화려해진다. 편집이 귀찮기도 하고, 편집하지 않아도 빛은 잠자고 있던 고유 색감에 싹을 틔운 뒤 적절한 추수를 한다. 몇 년 전 공중파를 타고 유명세의 반열에 오른 느티나무는 타는 듯한 대낮에 농심의 그루터기와도 같은 존재다. 또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멀찍이 차를 세우고 걸어와 느긋하게 자리를 잡아 카메라 시뮬레이션 모드를 바꿔가며 사진에 담는다. 자리를 바꿔서 몇 장 담은 뒤 나무 그늘 아래서 쉴 때 품앗이로 일하시던 어른 한 분이 옆에서 쉬신다. 어디 사시는지 말씀을 묻자 성주에서 오셨다며, 마당에서 키운 개복숭을 건네신다. 한 입 ..

낭만의 태동, 의동마을 은행나무길_20200616

가을이면 소위 말하는 낭만을 찾아 전국은 역동한다. 은행나무 심연의 나뭇결과 함께 완연한 노란빛이 더해져 특유의 성숙함이 극에 달할 때 외면은 관심으로 거듭나고, 그 나무 아래서 낭만은 빅뱅 하게 된다. 칼을 뽑은 김에 무를 싹뚝해 버린다고, 거창을 찾은 김에 온천하고 적막 속에서 조금씩 태동 중인 낭만을 미리 맛본다. 물론 가을에 비할 바 못되지만 길을 가득 채운 인파보다 차라리 황량함이 낫다. 외면과 관심은 손바닥 뒤집기 같다. 나름 녹음 짙은 이 길도 운치 있구먼. 영글어 가는 사과. 나른한 오후의 나른한 풍경.

우뚝선 한순간, 오도산_20200615

칠성대에 이어 황매산 은하수를 기대했지만 불발의 아쉬움으로 찾아간 오도산은 처음이 아니었다. 여기 또한 앞서 들렀던 칠성대처럼 사방에 시야가 트여 천리안의 시원스런 시야를 봉인할 수 있었는데 예사롭게 부는 바람 조차 예사내기가 아닌 건 인간의 감정이 덧씌울 수 있는 최고의마법 중 하나다. 미세 먼지로 인하여, 쨍한 햇살로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도 사실은 투정일 뿐, 여행은 내가 원하는 퍼즐처럼 일기와 만족을 모두 낚을 수 없지만, 로또처럼 기대감에 감성의 환각을챙길 수 있다. 다만 로또와 차이점은 결과가 허무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만족에 몸서리 치며 추억이 풍성해지는 것과의 차이랄까? 앞서 들렀던 칠성대와 이곳 오도산의 공통점은 해발 고도 1,100m를 살짝 상회한다는 것과 사방이 트여..

작은 절경과 호수를 질주하다, 운일암반일암과 용담호_20200615

운장산 칠성대를 벗어나 용담호로 가는 길목에서 힘찬 물소리에 이끌려 잠시 쉬어간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길을 따라가던 중 불영계곡을 축소한 듯한 작은 계곡에 작은 팔각정을 만났고, 그 자리에 서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여울 소리에 남은 사념을 풀어헤친다. 검룡소에서 처럼 일체 소음이 배제된 흐르는 물소리에도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도덕정에 잠시 멈춰서 바위가 연이은 계곡의 비경과 물소리를 감상한다. 같은 쉼표라 할지라도 이왕이면 선이 굵은 점을 찍을 수 있었다. 팔각정은 잠시 오르막으로 소소한 높이에서 굽이치는 물살과 소리를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