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445

싼티 나고 조악한 키작 선풍기_20200625

오랜 직장 생활을 접고 구의동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마련한 친구의 선물로 쥐콩만한 선풍기를 사서 룰루랄라 가는 날. 다른 친구들도 제시간에 찾아와 허기진 배를 달랜다. 작은 크기에 비해 소음은 강한 고주파음처럼 무시할 수준이 아닌데 생긴 모양새로 봐선 책상 아래 발치에 두고 사용하면 좋을 거 같다. 친구 녀석도 주방에서 발치나 허리 높이 정도에 두고 사용하면 알맞긴 하나 막상 선풍기를 꺼내서 틀자 생각보다 바람도 약해서 다음부턴 이런 중국산 싼티 나는 제품은 선물 용도에 적합하지 않겠다. 저렴한 맛에, 서브용으로 발치에 두면 딱 맞을 녀석이다.

적막의 비가 내리는 금성산성_20200624

아침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줄기가 정오를 지날 무렵부터 굵어져 금성산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작은 실개울을 만들었다. 전날과 같은 길을 답습한 이유는 내리는 비로 인해 텅 빈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용문에서 만난 굶주린 어미 고양이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교적 화창한 담양은 가지런히 정렬된 새침한 느낌이라면 비 오는 날엔 슬픈 곡조를 목 놓아 부르는 망부석 같은 느낌이었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빗소리는 상당히 정제되어 풍경과 달리 고요했고, 아무도 찾지 않은 산성은 희로애락을 극도로 배제하며 차분한 모습은 잃지 않는다. 어디론가 서서히 흘러가는 물안개는 지상에서 남은 슬픔을 모두 껴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도, 안개도 ..

깔끔한 멸치육수, 진우네집 국수_20200624

흡사 타운하우스를 닮은 모습, 비교적 들어선지 오래된 축에 비하면 관리는 잘 되어 있지만, 어떻게 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는 있다. 그래도 메타세쿼이아길과 인척이라는 점. 근래 여행 중 어떤 곳과 비교해도 가벼운 부담에 비해 공간이 너른 점. 일대가 펜션 단지라 이질적인 감정 이입에 소모하지 않아도 외형적인 특별함이 부여된다는 점.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밀집하는 공공장소, 특히 맛집 탐방은 주변을 서성이며 이용객이 적은 지 눈치 아닌 눈치를 봤던 걸 감안했을 경우 여기는 마치 내집처럼 조리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테리어가 가정적이다. 초여름이라 담양에 있던 시간 동안 여행객이 적어 심적 부담이 없던 것도 한몫했다. 타운하우스 정원 같다. 다만 앞에 저 까칠한 표정의 동상 덕분으로 밤에 ..

성숙한 강변길, 관방제림_20200623

해가 지고 인공으로 조성된 불빛이 억제된 야망을 뚫듯 기어 나올 무렵 어느새 관방제림에 섞여 있다. 인공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이지만 마을에 한 그루 정도 있을 법한 멋진 나무가 관방제림에선 구성원 중 하나 정도. 무심히 밤 산책을 즐기는 담양 사람들과 달리 강변을 따라 늘어선 숲길 나무는 손끝에 묘한 쾌감을 두드렸다. 평범하게 자라는 나무가 인고의 역사를 거쳐 범상한 모습으로 바뀌며, 수동적인 생명의 거부할 수 없는 상처는 훗날 활자를 새기듯 시련을 거친 인내의 상징이 되고, 얕은 의지를 한탄하는 생명의 스승이 되어 버렸다. 메타세쿼이아길이 자로 잰 듯 오차 없이 정갈한 가공으로 걷는 동안 절도의 세련미를 배웠다면 관방제림 길은 아무렇게나 뿌리를 내려 도저히 가공이 불가능하였음에도 전체적인 그들만의 규율 ..

시간의 자취, 담양 메타세쿼이아길_20200623

걷다 걷다 다리가 지친 들 멈출 수 있을까? 잠시 멈춘 사이 길 위에 서린 아름다운 시간들이 흩어질까 두려워 사뿐한 발걸음을 늦추더라도 멈출 순 없다. 가을만큼은 아니지만 여름에 걷는 이 길도 막연히 걷다 가끔 뒤돌아 보게 된다. 가슴에서 미어터지는 아름다운 추억에 저미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이 끝나는 아쉬움에 비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참 부럽다. 많은 이야기들을 벅찬 내색 없이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공장, 서플라이_20200623

어떤 이에겐 추억의 향수가, 또 다른 어떤 이에겐 이색적인 체험일 수 있는 공장 카페는 근래 들어 꽤나 많이 탄생했고, 건물 특성상 너른 규모에 높은 천장을 무기로 기존 카페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어필한다. 테이블과 체어도 과거 공장의 분위기에 일조할 수 있도록 낡고 조악한 것들을 활용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잠재된 엔틱을 극대화시켰다. 커피맛은 그저 그렇더라도 감성에 대한 투자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과 저녁 식사 후 한눈에 들어온 공장형 카페로 간판도 엔틱하다. 모든 소품들은 하나 같이 재탄생하며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의자는 어디서 구했을까? 이런 형태의 카페에 발길이 붙잡히면 기어이 꼭 앉아봐야 된다. 출입문은 아니지만 카페 외관에서 4번 타자 격이다. 내부는 공장 분..

여유의 세계, 금성산성_20200623

이번 담양 여행의 목적은 국내 최고의 인공 활엽수림인 관방제림과 강천산과 이어진 산자락 끝에 담양 일대를 굽이 보는 금성산성. 소쇄원,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은 워낙 유명 인싸인데다 특히나 소쇄원은 광주와 화순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멀고 3년 전에 다녀온 터라 이번 여행 동선에선 고려하지 않았다. 지인과 저녁 식사 약속으로 시간이 촉박하여 금성산성 초입 보국문과 충용문까지 여행하기로 한다.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백팩 하나 짊어진 채 금성산성으로 향하면 산성 탐방 안내도가 나와 대략적인 잣대가 된다. 산길치곤 완만하고 너른 길이라 걷기 알맞다. 거기에 더해 이런 대숲과 나무 터널이 있고, 걷는 동안 숲을 쓸어 올리는 바람 소리는 곁들여진 음악과 같다. 나비 하나 나풀거리며 주위를 맴돈다. 20..

사람 흔적이 떠난 강천산 탐방로_20200623

담양에서 순창과 경계를 이루는 강천산 탐방길에 들어서자 마치 산속 깊은 오지에 온 착각에 빠진다. 아름다운 가을 모습을 두고 여름이 엄습한 강천산은 그야말로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물론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강천산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위성 지도만 챙긴 내 과오라 큰 깨달음을 챙긴 것도 여행에서 즉흥적으로 짜여진 각본이라 하겠다. 인적이 전혀 없는 용광로 같은 산중에도 내가 무심히 잊고 있던 여름 생명들이 엘도라도를 만들어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지극히 평이한 풍경이지만, 각별한 풍경이 되어 버린 서울에서 하나둘 사라져 버린 생명을 망각하며 점점 무심해져 간다. 길가에 기이한 돌탑이랄까? 담양에서 순창에 진입하여 강천산 탐방로를 향해 임도를 가던 중 이런 형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