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막연히 그리운 곳, 담양과 정선 중 하늘숲길이 있는 정선땅을 밟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들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공존의 친근함을 과시하는 하늘숲길 일대는 무겁게 석탄을 이고 가는 삼륜차에 밟히고, 시간의 폭풍에 먼지처럼 옛 시절이 흩어지자 이제는 고독에 밟힌다.
언젠가 사라질 약속처럼 한 때 세상을 풍미하던 석탄은 비록 폐부와 생존의 지루한 복병이었지만 이제는 사무친 그리움의 석상이 되어 비록 까맣던 흔적이 증발해 버릴지언정 가슴에 새겨진 기억은 돌처럼 더욱 굳어져 버렸다.
그 애환을 아는지 속절 없이 능선을 넘은 바람은 선명한 자취처럼 꿈틀대는 운탄고도에서 긴 한숨을 돌리며 터질 듯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잊혀진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또한 걷는 게 어느 누구에게 있어 고행이 아닌 휴복인 것을.
걷는 중간중간 홀짝이는 커피 한 모금이 목을 간지럽히고, 잠자리가 보폭을 맞추며 날개를 연신 들썩인다.
고한에서 커피 한 잔 담아 하늘숲길을 찾았는데 절정의 가을이 지난 평일이라 한적한 가운데 조급한 마음이 들어설 틈 없이 느긋하게 길을 밟았다.
하늘숲길, 운탄고도에 발을 들인 게 이번이 몇 번째일까?
10월 중순에 추위의 역습으로 올 가을은 단풍의 매력이 반감되었다.
산봉우리는 벌써 겨울이고 언저리는 특유의 가을색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단풍 한 그루가 그나마 붉게 피어 희소한 탓에 더욱 돋보였고 반가웠다.
주차한 뒤 얼마 걷지 않아 길 초입에 멋진 전나무숲길을 만났다.
혼자만의 착각일지라도 격한 환영과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자태와 가을색이 멋진 곳이다.
간간히 사람을 마주할 수 있는 화절령 방면으로 궈궈!
예년에 비해 올가을은 서둘러 자취를 감췄다.
전형적인 가을날씨에 완연한 겨울 풍경이라...
긴 구간을 함께 한 잠자리 하나가 날다 쉬다를 반복했는데 앞서 도착하여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산과 달리 백운산은 거대한 위용에 둥그스름했다.
분명 이 일대를 지켜주는 큰 어른다운 외형이다.
마운틴콘도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목적지는 화절령과 도롱이연못이라 대략 7.7km 조금 더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가늘게 들리던 물방울 소리를 찾아보니 땅속에서 녹물이 솟아난다.
모운동에서는 폐광산에 물이 들어차 그걸 인위적으로 빼내며 폭포수처럼 흘렸고 그 모습이 황금 폭포수 같아 황금폭포라 칭했었다.
을씨년스럽긴 해도 미세하게 남은 만추의 전경을 보며 경쾌하게 걸었고, 걷는 내내 피로감을 느낄 겨를 없었다.
마운틴 콘도는 7km 남았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이 너른 길을 뒤덮은 전나무숲 쉼터에 다다랐다.
여기 올 때마다 감탄사를 뱉는 건 늘 변함없었다.
위성지도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 시설물은 폐광 갱내수 정화시설이란다.
운탄고도를 걷다 보면 종종 눈에 띄는데 정화 목적이란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또르르 들리는 물소리가 반가워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긴 완연한 겨울에 접어들었는지 길에 낙엽이 자욱하고 가지는 위태롭게 남은 이파리가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졌다.
줄에 매달린 애벌레가 겨울 준비하는 걸까?
강한 햇살이 녀석의 미세한 솜털에 굴절되었다.
이제는 정식명칭이 운탄고도 1330이며, 여긴 05번 존이었다.
마운틴 콘도는 5.7km 남았으니까 아직은 한참을 걸어야만 했지만 숫자에 무덤덤했다.
다시 만난 전나무숲 쉼터엔 인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이원마운틴 콘도가 보이면 화절령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데?
가을 지나 겨울이 가까워지면 전나무숲은 특유의 그윽한 빛깔로 변한다.
영월 방면으로 확 트인 길을 걷던 중 처음으로 트래킹 중인 사람을 만났다.
60대 여성 두 분이 지팡이를 짚고 백팩엔 작은 종을 달았는데 걸음을 뗄 때마다 연신 미세한 종소리가 찰랑거렸고, 이유를 여쭙자 멧돼지 쫓을 목적으로 달고 다니신단다.
아무래도 내 걸음이 좀 더 빨라 추월하며 반가움이 가득 담긴 인사를 건네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가끔 통화불가지역이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전파가 잡혔다.
다람쥐가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봤다.
요런 세젤귀 같은 녀석~
막장의 유래.
탄광이 많았던 정선에 작은 갱도를 재현해 놓았고, 그 앞에서 주름이 자글한 얼굴로 환한 미소를 드리운 광부가 맞이했다.
깊은 지하의 사선에서 항상 가장의 책임을 놓지 않으셨던 우리네 아버지들, 그래서 미소에 숨겨진 안도를 읽을 수 있었다.
막상 갱도를 들어가 보면 아주 짧은 구간만 재현해 놓았지만 그 맞은편 발치에 첩첩 산능선은 삶의 애환을 자연이 아우르고 보듬어줄 심산이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무심한 바람조차 삶의 전장에서 빠져나온 안도의 징표였다.
오전에 뿌옇던 미세먼지가 조금은 걷히고 남쪽하늘에 겹겹이 산능선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갱도를 지나 낙엽 자욱한 길을 걷는 사이 어느새 도롱이연못이 있는 너른 쉼터는 가까워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고, 첫걸음부터 걷는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된 건 피로감을 압도한 길섶 전경과 기억에 감춰진 추억이 있기에 가능했다.
도롱이 연못에 도착하자 묵직한 추억의 회상에 잠겨 무중력의 홀가분한 유영을 한다.
막장에서 조차 이겨낸 징표가 바로 운탄고도인 걸.
그래서 이 길은 위성에서 조차 조각칼로 깊이 새긴 자욱처럼 선명하다.
애환, 눈물, 설움을...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닿지 않는 산이기에 묵묵히 새겨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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