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자연 그리고 만남

가을 그리움의 길, 정선 운탄고도_20241012

사려울 2024. 11. 6. 23:27

유독 가을이 되면 궁금하거나 그리운 곳이 잡념보다 더욱 강하게 의식의 바다에 거친 파랑을 만들게 되고, 그로 인해 기억의 주춧돌 위에 되새기게 되는데 그런 곳이 전국 팔도에 꽤 많이 떠올랐다.

전남 담양의 새벽 안개와 여명에 휩싸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펼쳐진 24번 국도 옆 담순로, 가을이 수놓은 섬진강 벌판 위에 우뚝 선 칼바위 능선의 채계산, 자연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그 아래 인간이 하나씩 걸쳐 놓은 흔적이 조화로운 선암사, 자욱한 물안개에 철새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설렘을 엿볼 수 있는 우포, 거친 이면에 아릿다운 가을 풍경이 무심한 듯 뿌려진 영양의 동맥 같은 길, 평온의 마법으로 각양각색의 가을이 서로 뽐내는 통고산, 높은 지대에서 이른 가을 나기에 들어가 겨울과 묘한 경계심을 허물고 그 아래 인간의 삶이 투영된 태백, 멀찍이 가을이 오는 길에 마중 나간 착각이 드는 운탄고도, 이름만큼 정겨우면서 내면의 거대한 순리를 간직한 정선, 자연이 만든 바위산에 인간이 살짝 올려놓은 돌탑이 가을 연무를 첨예하게 뚫고 우뚝 솟은 치악산, 남북의 경계에 서서 절망과 절경 사이를 꿈틀거리는 대암산 용늪, 서해 바다에 장벽처럼 솟아올라 감탄에 굳어 버린 오서산, 가을을 위해 1년을 절제하고 인내하여 노란 갈망을 터트린 곡교천 은행나무길, 단 하나에 대한 장쾌한 감탄을 눈앞에서 교감할 수 있는 반계리 은행나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테고, 다니자면 가을이 끝날 테고, 꿈만 꾸자면 흩어질 테고.

비교적 이른 가을의 융단을 미리 깔아놓는 정선으로 향했고, 설익은 가을과 함께 성숙한 가을의 흔적들도 엿볼 수 있었다.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고원의 길
영월, 정선, 태백, 삼척 폐광지역의 점(點)을 하나의 선(線)으로 잇다
[출처] 운탄고도1330_운탄고도 통합안내센터

 

운탄고도1330

영월, 정선, 태백, 삼척을 아우르는 폐광지역 걷는 길! 운탄고도 1330, 강원을 걷다.

www.untan133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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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 점심 식사와 커피까지 해결한 뒤 느긋하게 정선으로 넘어와 약속처럼 주차하던 자리에 차량을 두고 동행한 동생과 함께 운탄고도로 향한 오르막길에 접어들어 약 10여 분을 올라 그간 그리고 그립던 운탄고도에 발을 내디뎠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화절령-하이원팰리스 호텔 구간은 그리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그리 을씨년스럽지도 않아 지나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들도 풍경의 요소가 되었다.

다만 아쉬웠던 건 온 세상을 보여줄 것만 같던 연일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미세 먼지로 인해 비교적 자욱했다.

그만큼 바람이 적어 활동하기엔 알맞기도 했지만 난 가을바람이 살랑이는 청명한 하늘이 훨씬 좋거든.

길을 동행하던 동생은 처음 운탄고도로 진입하는 구간의 비교적 가파른 길에서 무척 힘들어했고, 심지어 자신은 걸음이 느려져 흥을 깰까 싶어 배려차원에 먼저 앞서서 걸어가란다.

천천히 걸어도 좋으니까 같은 속도로 걸어 너무 의식하지 말라는 말에 조금 미안한 기색을 보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막이 완만해지고 운탄고도에 진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잘거리며 씩씩하게 걷는 모습에서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운탄고도 1330 5길은 만항재에서 화절령까지 구간의 15.7km 편도 거리라 왕복으로 따지면 30km가 넘어 다시 원점 회귀 땜시롱 도중 하이원CC 부근에서 진입한 셈인데 그렇더라도 왕복 15km 가까운 거리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산책하기엔 적당했다, 최소한 내 기준에서.

정선 일대는 단풍이 유명한 곳이 아닌 데다 운탄고도는 특히나 화려한 곳이 없어 이따금 마주치는 가을 단풍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고, 화창한 햇살이 굴절된 단풍은 특히나 곱디고웠다.

3년 만에 찾은 운탄고도는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며 늘 계절의 전령사가 되었지만 묵직한 평온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운탄고도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체감할 수 없는 완만함으로 인해 오롯이 걷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문득 길의 시선이 넓어지며 멀리 거대하고 육중한 백운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설프게나마 등산이랍시고 산을 오를 때 대부분의 산은 봉우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가팔라지기 마련이었고, 하물며 동네 뒷산처럼 오르던 필봉산이나 구봉산, 반석산은 물론이고 봉담에 있던 건달산 또한 전형적으로 봉우리가 첨예했는데 그와 달리 백운산은 봉우리가 고원처럼 뭉특한 형세였다.

길가 나무들이 듬성해지고 키가 작아지자 숨어 있던 가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백운산의 거대한 위세를 압도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미세 먼지 주의보에도 전혀 혼탁하지 않은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라 닫혀 있던 가슴의 문이 송두리째 뽑히듯 탄성과 함께 하늘로 이입되었다.

대화를 나누며 정신없이 걷는 사이 다시 나무숲을 관통하는 구간에 접어들었다.

특히나 멋진 전나무숲 구간은 장대하거나 밀도가 높은 건 아니었지만 길을 가운데 두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숲의 수종들에 깃든 가을로 인해 저마다 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일상을 보내는 진천이나 동탄만 하더라도 여전히 여름과 별반 차이 없이 짙은 녹음이 여전하건만 고도가 1천m 넘는 운탄고도엔 벌써 가을이 수놓기 시작했다.

전국 유명 가을 명소와 달리 운탄고도 일대는 어여쁜 가을을 대표하는 수종이 그리 많지 않아 퇴색되는 여름에 가깝지만 가을은 시각의 역치만 흔드는 게 아니라 다른 감각기관에도 쾌감을 흔들어 깨우는 만큼 운탄고도엔 현란한 가을보단 성숙한 가을색과 더불어 뺨에 닿는 바람과 가을 산의 진중한 자연 소리, 그리고 그윽한 숲내음과 향긋한 낙엽 내음이 함께 전해져 왔다.

갱내수 정화시설이 이제는 작은 쉼터가 되어 정자가 들어서 운탄고도를 거니는 나그네가 한숨을 돌리며 가을을 곱씹는 곳이 되었다.

실제 자전거 동호회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그분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여기서 한숨을 돌리며 사진도 찍고 간단한 요기도 했다.

미세 먼지도 가릴 수 없는 따스한 가을볕에 잠시 쉬어가는데 호랑나비 하나 꽃에 날아들어 볕을 쪼였다.

살랑이는 바람이 꽃과 가지를 흔들어도 가을볕이 얼마나 달콤했길래 날아가지도 않고 굳은 듯 자리를 잡았다.

너덜 구간에서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돌무더기를 길가에 쌓은 구간을 지날 즈음 걷던 동생이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어린 뱀 하나가 부리나케 산으로 오르려는데 돌무더기가 높아 오르지 못하자 돌무더기 틈으로 몸을 숨겼다.

순간 사진을 찍는다고 셔터를 눌렀는데 어찌나 녀석이 빠른지 금세 몸을 숨겼고, 그만큼 녀석은 사람들을 보고 개거품을 물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뱀은 굳이 누군가를 위협하지 않고 자신이 위협을 느꼈을 때 방어하는 거라 의도치 않게 녀석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어느덧 탄광을 재현한 갱도에 다다라 잠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남쪽으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봤다.

연일 청명하던 날씨가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이곳 아래 펼쳐진 세상은 언제 봐도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던 청년이 멈춰 휴식을 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를 번쩍 들어 동상의 팔에 걸쳤다.

그러곤 두 사람이 사진을 찍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과 신선한 기지에 칭찬 한 마디를 건넸다.

갱도를 출발하여 다시 대화를 나누며 걷는 동안 어느새 도롱이 연못에 도착했지만 단편영화 촬영이 있어 도롱이 연못에 출입할 수 없단다.

어차피 목적지는 화절령이라 도롱이 연못에서 쉬는 걸 참고 계속 걷던 방향으로 걸었다.

나름 멋진 낙엽송숲이라 가을로 변한 정취가 궁금했지만 아직은 가을로 향한 준비에 여념 없어 가을 분위기는 옅게만 배어있었다.

도롱이 연못에서 화절령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몇 차례 크게 굽이치는 길을 지나면 이내 도착했다.

무심히 졸고 있던 노랗게 퇴색된 단풍에 가을볕이 흔들어 깨워 눈부신 빛파동을 뿜어댔다.

표현은 노랑이라 하지만 고유한 빛깔의 유전자는 무한함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화절령의 명품숲.

화절령에 도착하자 산을 넘어 잠시 쉬던 산중의 찬 가을바람이 다시 꿈틀거렸다.

모처럼 오래 걷는 터라 달달한 간식이 땡겼지만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하고 생수 2병만 달랑 들고 왔두만 허기가 꿈틀거려 잠시 앉아 한숨을 돌린 뒤 왔던 길로 걸음을 디뎠다.

전나무숲 아래 다람쥐 하나가 사람을 구경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뒤돌아섰는데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앙증맞았다.

돌아가는 길에 도롱이 연못을 지나게 되었는데 촬영을 접고 잠시 쉬는 타임이라 연못을 대충 둘러보곤 물 한 모금 마신 후 바로 출발했다.

종종 눈에 띄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뜸해졌고, 늦은 시각이 아니었음에도 산골 시계는 비교적 빨리 흘러 초저녁처럼 해가 기운만큼 강렬하던 햇볕이 많이 약화되었다.

갱도 광부께도 인사 삐쭉~

언제, 어느 방향에서 봐도 백운산의 위세는 거대해 마치 자연이 만든 장벽 같았다.

때마침 작은 억새밭이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려 유혹했다.

나무가 자라며 큰 가지가 꺾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움터 가을에 반하는 싱그러운 녹색으로 채워 공허한 상처를 가렸다.

자연은 공존공생하며 빈자리에도 다른 생명들에게 자리를 내어 줘 관용조차 나눴고, 공백은 죽음이 아닌 탄생이었다.

한 무리 단풍숲에 가을이 뿌리를 내려 붉게 물들였다.

서쪽으로 해가 많이 기울어 볕이 가려진 길의 굽이치는 자리에 이런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건만 막상 결과물은 화려한 첫인상이 퇴색되어 사진을 찍은 뒤 씁쓸한 표정을 짓자 동생이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찍고 나선 생각보다 안 이쁘지 않냐고 물었다.

이 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면 운탄고도 옆의 곁길이 나왔고, 그 곁길을 내려가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던 길이었다.

둘이 걸으며 대화를 나누느라 많은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다행히 몇 번 다녔던 낯이 있어 기억은 명징하게 남았고, 대신 사진을 찍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시간을 줄여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운탄고도의 친숙하던 구간을 즐길 수 있었다.

차량을 주차한 출발점에 다다르자 대낮과는 다르게 서쪽으로 완연하게 기운 햇살이 그마저 거대한 백운산에 가려져 초저녁 가을 정취가 이르게 재현되었다.

돌아와서 주변을 둘러보자 길가 가로수에 깃든 가을 또한 녹색과 적색이 뒤섞여 이쁘기만 했는데 운탄고도 여정을 즐기는 동안 물 몇 모금 마신 게 전부라 차에 돌아와 간식을 허겁지겁 비웠고, 곧장 고한으로 내려가 터무니없는 자장면 집에서 이물질 두 개나 나온 탕수육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도중에 뛰쳐나와 일찍 숙소를 체크인했다.

자장면 집에 자장면이 더럽게 맛이 없었던 데다 가격에 비해 양은 더럽게 적어 웃픈 해프닝으로 삼기엔 여정의 마무리가 너무 씁쓸했다.

물론 다시는 그 동네 음식점을 얼씬 거리지 않아도 되는 건 내 선택이자 결정이겠지만 그 시간, 그 가격에 정선장에 간다면 포식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을 것을.

그럼에도 정선의 가을은 시각의 아름다움을 초월하여 행복을 자극하는 도파민까지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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