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21

범상치 않은 웅크림, 화엄사에서_20191128

지리산 일대 사찰 중 규모와 짜임새가 유명한 화엄사는 꽤 가까이 있어 큰 마음 먹지 않아도 쉽게 접근하고, 둘러 볼 수 있었다.월정사, 해인사, 통도사와 같이 상징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화엄사를 찾았을 때는 다행히 방문객이 적어 둘러 보기 수월했다.북에서 내려오는 겨울이 이곳까지 당도하기엔 시간이 좀 걸리는지 찬란한 단풍색이 입구에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기느라 화려한 손짓에 현혹되기 쉽지만, 사찰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화려함을 넘어선 진중한 분위기에 직면하게 된다.엄밀하게 따진다면 지리산이 아우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 큰 어른 답게 일체 미동도 않고, 그저 한 자리를 지키며 굽이굽이 살피는 것만으로도 화엄사는 영속적인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거다. 화엄사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사찰까지 도보로..

지리산이라는 거대 장벽을 마주하다_20191128

구례 2일째 되는 날은 딱 2군데만 들리기로 했다.회사 동료 한 명이 구례가 고향이라 강추한 맛집과 외지인이 잘 모르는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를 빼곡히 귀띔해 줬는데 사실 혼자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잦은 이동에 따른 체력적인 부담과 더불어 피로도가 증가할 수 밖에 없어 최대한 동선을 줄이면서 알짜배기만 다니기로 했다.그래서 화엄사와 구례 맛집 2군데를 들리기로 했는데 화엄사는 동료가 추천한 건 아니고 지리산, 아니 전국 사찰을 통틀어 워낙 유명한 사찰이라 어찌보면 당연하게 방문해야 되는 것 아니것소잉.아침에 자고 일어나 넓게 트인 전망으로 난 커튼을 열어 젖히자 아쉽게도 대기가 뿌옇다.이미 뉴스에서 한 바탕 호들갑 떨었기 때문에 감안은 했지만 막상 미세 먼지로 뿌연 대기를 마주하자 아쉬움은 이만저만이..

지나는 가을에 남은 미련, 천은사_20191127

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남원에서 오를 때보다 더 가파른 도로를 굽이쳐 내려와 어느덧 경사길이 완만해 질 무렵 차량 지도에는 천은사가 표기되어 있고 그 옆은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구례 여정에서 지낼 숙소는 미리 예약한 야생화 테마랜드 내 숲속수목가옥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목적지가 가까워진 만큼 시간 여유가 있어 861지방도 인척에 있는 천은사에 들르는 건 부담이 없었다.도로와 지척에 있는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얼마 걷지 않아 바로 천은사에 도착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초입부터 인상적인 풍경으로 인해 도보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사찰까지 세세하게 주변을 둘러 보며 30분 정도 소요됐다. 주차장에 차를 두면 바로 천은사가 어느 방향인지 초입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입구 바로 옆은 절정의 단풍이 ..

큰 어르신 지리산에 안기다_20191127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따라 곧장 남원 인월에 도착한 건 정오가 살짝 지난 시각이었다.지리산의 거대한 형체가 먼곳부터 어렴풋이 유혹의 촉수를 뻗히고, 그와 더불어 최종 목적지인 구례 또한 지리산에 기대어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단아한 도시라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로 언젠가 부터 벼르고 벼르던 결정이었다.2013~2014년 초까지 출장이란 명분으로 남원을 뻔질나게 다니던 인연으로 제법 익숙한 지역이란 명분에 힘 입어 뱀사골 너머 구례는 늘 '멀지만 두루두루' 가봐야 되는 여정의 코스로 낙인을 찍어 두었고, 더불어 예전엔 산채 요리가 잡초향 가득한 몸에 좋은 음식 정도로 치부 했지만 뱀사골 초입 즐비한 산채 식당을 방문한 이후로 몇 년 지나도록 그 즐겁던 혀 끝의 미각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과감히 뱀사골을 경..

합천호에 떠다니는 나무_20191127

오도산 휴양림과 작별을 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합천을 떠나 거창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호수 위를 떠다니는 나무에 반하던 순간이었다.사막 마냥 황량한 거대 호수에 오아시스처럼 작은 재미를 주는 나무는 사실 떠다니는 게 아니라 작은 섬에 의지해 수면 위로 불쑥 솟아 가만히 서 있고 호수를 스치는 바람에 이끌려 호수의 작은 물결이 흐르자 마치 나무가 호수를 표류하는 것만 같은 착시 효과 였다. 다음 여정의 목적지인 남원으로 출발하여 거창 대야를 지나던 중 호수 위로 솟은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편평한 수면 위에 가을 옷을 껴입은 나무라 그 모습이 도드라졌기 때문인데 적당히 차를 세워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길가에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 서행 하며 가던 중 깔끔하게 정돈된 대야 마을에 닿자 너른 갓길이 ..

오도산 휴양림에서 마지막 시간_20191126

전 날 비슷한 시각에 오도산 휴양림으로 첫 발을 디딘게 아쉬울 만큼 하루 시간은 금새 지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첫날은 휴양림을 통틀어 우리 뿐이었고, 이틀째 접어든 날은 비록 집 한 채 불이 켜져 있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이라 첫째 날과 진배 없었다.산에서 맞이하는 초겨울 추위라 기온도, 분위기도 싸늘 했는데 그나마 마당 한 가운데 덩그러니 불빛을 밝히던 녀석이 유일한 세상의 빛과 같았다.늘 그렇듯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주변을 서성이다 밤하늘 총총한 별을 카메라로 담았지만 기대했던 은하수는 보이질 않고, 시간이 지날 수록 구름이 삽시간에 몰려와 하늘을 덮어 버렸다. 별은 밝지만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별이 빼곡 하게 박혀 있지 않았고, 점차 구름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물론 도시나 수도권 어디..

오도산 정상에서 천리안의 시선으로_20191126

독수리의 천리안이 되어 넓은 세상을 한아름 품어 시선의 경계점에 대한 동경의 나래를 펼친 날이다.시선이 닿는 곳은 금수강산이 새겨 놓은 장관이, 햇살이 닿는 곳은 구름이 새겨 놓은 뜻깊은 상형 문자의 아름다운 싯구가 넘치는 세상이었다.계절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충실하고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간과하지 않게 훈계해 주는 자연의 가르침을 이고지며 하늘과 가까운 꼭지점에 서서 아무런 말 없이 겸허해 졌다. 평소 기나긴 동선을 따른 것과 달리 이번 여정은 잦은 이동을 배제한 만큼 합천에 있는 동안 오도산 정상만 목적지로 삼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을 따라 결국 산봉우리에 다다랐다.도착과 동시에 뒤따른 오토바이 한 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평일의 한적함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는데 산 정상엔..

적막한 오도산자락_20191125

초저녁 무렵 거창에 도착하여 푸짐한 저녁 끼니를 해결하고 거창 읍내를 둘러 보다 마땅한 눈요기 거리가 없어 최종 목적지인 오도산 휴양림에 도착했다.처음 체크인을 하러 관리실에 도착하자 방이 하나만 예약이 되어 있어 우리가 아닌 줄 알았단다. 미리 예약한 숙소는 관리실과 가까우면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너른 공터를 중심으로 다섯 세대가 동그랗게 모여 있고, 그 중심엔 나무 한 그루, 가로등 하나 덩그러니 놓여 스산한 겨울 길목에서 그나마 조금은 작은 불씨처럼 따스한 분위기를 발산했다.날카로운 초겨울 칼바람 속에 텅빈 공간을 홀로 유유자적하고 있는 사이 굶주린 어린 길냥이 한 마리가 야생의 경계심을 놓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곤 가만히 앉아 있어 때마침 가방에 챙긴 츄르 3개를 끄집어 내어 하나를 주자 신중..

순천 다녀 오는 길_20191108

작년 함께 캠퍼스를 밟았던 학우들 만나러 순천을 갔다 걸판지게 마시고 완전히 새 됐다.워낙 뚝배기 같은 학우가 순천과 곡성-이 형은 10월에 전주에서 만났지만-에 살아 한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았는데 창원에 사는 학우도 꼭 참석하겠다고 해서 서울, 곡성, 순천, 창원에서 가장 모이기 쉬운 장소를 순천으로 결정 했고, 주말에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하자 마자 들이 마셨다.순천, 창원 학우는 꾸준하게 연락하며 지냈지만 1년 만에 처음 본 거나 마찬가지.일 요일에 순천을 좀 돌아다니며 사진은 전혀 찍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텅빈 순천역 광장에 서서 빠듯하지만 남는 미련을 삭히지 못하고 뒤돌아서 둘러 봤다.얕은 비를 뿌린 전날의 여운이 남아 세찬 바람과 함께 잔뜩 흐리다. 덜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