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넋두리

범상치 않은 웅크림, 화엄사에서_20191128

사려울 2019. 12. 30. 02:38

지리산 일대 사찰 중 규모와 짜임새가 유명한 화엄사는 꽤 가까이 있어 큰 마음 먹지 않아도 쉽게 접근하고, 둘러 볼 수 있었다.

월정사, 해인사, 통도사와 같이 상징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화엄사를 찾았을 때는 다행히 방문객이 적어 둘러 보기 수월했다.

북에서 내려오는 겨울이 이곳까지 당도하기엔 시간이 좀 걸리는지 찬란한 단풍색이 입구에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기느라 화려한 손짓에 현혹되기 쉽지만, 사찰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화려함을 넘어선 진중한 분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지리산이 아우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 큰 어른 답게 일체 미동도 않고, 그저 한 자리를 지키며 굽이굽이 살피는 것만으로도 화엄사는 영속적인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거다.



화엄사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사찰까지 도보로 가는 길은 거의 인접한 거나 마찬가지라 쨍한 가을 볕을 받으며 가볍게 걸어 초입에 도착하자 익살스런 모습과 표정의 동자가 일렬로 반겼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날린 사찰이라 평일이지만 차가 제법 많고, 특히나 공기업 연수와 단체 관광이 눈에 띄게 많았다.



각각 명명된 여러 문을 지나도록 짜여져 있는데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하나의 문을 지날 때마다 길 양 옆의 오래된 풍경으로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경건한 분위기에 발자국 소리는 사그라들었다.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동선을 따라 늘어서 있고, 마치 고사목처럼 가지 표면을 곱게 갈아 니스칠을 한 것처럼 내리는 빛을 반사 시켜 반들반들하다.

그럼에도 잔가지에 미처 떨어지지 않은 이파리와 볼그레 홍조가 있는걸 보면 살아 있는 나무란 확신이 든다.

축대처럼 쌓아 놓은 돌은 미리 짜놓은 퍼즐 마냥 접선이 한결 같이 가지런하고, 나무 기둥에 덧칠해 놓은 물감은 시간의 흔적에 따라 컬러가 고르지 않지만 작위적이지 않아 오래 동안 든든히 지탱해 줄 거란 믿음이 들었다.




좀 더 깊은 곳으로 걷자 높은 축대 위에 보제루와 종각이 걸터앉아 있는데 종각은 온통 화려한 치장을 한 반면 보제루는 나무의 속성을 그대로 살려 놓고, 지나친 가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의 표면은 거칠지만 특유의 무늬와 색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처마를 훑어 보게 되면 어느 하나 같지 않고, 모두 저마다의 특성과 더불어 시간이 덫칠해져 생긴 뒤틀림이나 균열도 여과 없이 표현되었다.





대웅전이 있는 너른 마당에 석탑 두 동이 나란히 서 있고, 여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단층의 오색 찬란한 처마로 채색된 대웅전은 규모가 의외로 단촐하고 그에 비해 다른 법당들은 소박한 색상에, 특히나 각황전은 2층 목재 건물의 꽤 규모가 큰 법당이었다.



바람결을 따라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고요한 화엄사에 작은 파문처럼 은은히 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풍경이 반사하는 햇살은 금빛 눈부심을 연사 했다.



대웅전 너머 다시 여러 크고 작은 법당들이 들어서 있고, 그 배후에 지리산 노고단이 버티고 있어 절 규모 만큼이나 주위를 둘러싼 지세가 멋지고 웅장했다.



각황전에 올라 멋진 지리산의 산세를 읽던 중 새 한 마리가 광활한 허공을 가르며 비행하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시선이 쫓을 겨를이 없었지만 티 없이 맑은 하늘이라 시야엔 선명했다.



대웅전과 달리 각황전은 거의 가공 되지 않은 나무로 지어진 목재 건물로 꽤 규모가 크고 내부에선 나지막하고 잔잔한 법문이 울려 퍼졌다.

종교를 신봉하지 않지만 이런 산중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내음은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기분을 전환 시키는 매력이 있다.





마당 한 쪽의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는 각황전은 주위가 널찍한데 그 앞에서 주위를 둘러 보면 화엄사가 규모에 맞춰 알차고 정갈하게 꾸며진 걸 알 수 있었다.

대웅전과 연결되는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석탑이 있고, 마당은 대칭으로 길을 꾸며 놓아 더욱 정갈하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한 차례 많은 스님들이 잰걸음으로 어딘가 걸어가는데 그와 섞여 있는 여행자들도 잠시 그 무리에 뒤섞였다 일목요연하게 흩어지는 모습을 위에서 지켜 보자 갈 길이 약속된 것처럼 절도가 느껴졌다.



대웅전 마당을 벗어나 올 때와 다른 작은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데 범종이 있던 종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띄게 채색된 종각 옆은 만추를 맞이한 나무가 물들어 강렬한 햇살이 기대어 있고, 그 너머엔 높은 축대에 의지하여 펼쳐진 화엄사의 고풍스런 내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만월당엔 주렁주렁 감을 매달아 말리고 있어 조금은 특이한 정취가 펼쳐져 있다. 



스님과 인파가 올곧게 이동하고 있던 꽁무니를 쫓아 당도한 곳은 광학장 앞으로 많은 스님과 사람들이 모여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각별한 날인가 보다.

촬영으로 분주한 무리를 벗어나 마당 한 켠에서 속삭이는 물소리를 따라 맑고 투명한 샘에 도착했다.

미세 먼지로 대기가 살짝 흐렸고, 하루 종일 마땅한 휴식 없이 구례에서 부터 화엄사까지 쉴 새 없는 동선을 그렸지만 맑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샘물 앞에 서자 그러지 말자고 했던 조급함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쫓긴게 아닌가 후회가 들었다.

내 방식을 버리고 일행을 배려하자고 했던 첫 출발과 달리 어느새 내 방식에 젖어 동선을 강행 했던 걸 보면 애시당초 배려와 공감에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숙연함을 추스리고자 허기를 호소하는 일행과 화엄사를 출발하기로 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동자승 석상이 나열된 길에 잠시 서서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졌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스님 한 분의 실루엣이 보였다.



절 내부에 소소한 나무 이정표엔 잔디꽃 몇 송이가 함께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주차장에 내려오자 XX연수원 버스가 들어와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려 어디론가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자 다시 적막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주차장 한 켠에 붉게 타오르는 단풍은 떠나는 가을을 붙잡고 미련의 절절한 노래 가락 마냥 바람과 함께 가지를 흔들어 댔고, 바람에 따라 낙엽을 한 잎, 두 잎 떨구며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화엄사에 도착한지 1시간 반이 넘어 다른 일행은 허기와 피로에 지친 기색 인데 그걸 핀잔 했던 미안함이 끝내 가시질 않는 화엄사는 여전히 지리산자락에 말 없이 웅크린 채 진중한 무게감을 과시하는 듯 했다.

반응형